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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식물세밀화가·식물학 일러스트레이터 이소영식물을 기록하다
아침이면 편안한 등산복에 등산화를 신고 근처 산이나 식물원에 간다. 어제 꽃봉오리를 지었던 식물이 개화했는지, 또 다른 식물들이 얼마나 변화했는지 관찰하고 수집한다. 식물원에서 내려와 작업실에 들러 그 식물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해 드로잉하거나, 신문지 사이에 넣고 눌러 표본을 만든다. 그리고 어제 그렸던 미기록종 식물의 그림을 마저 그린다.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그는 늘 식물과 함께 지낸다.

내가 살던 곳에는 늘 식물이 있었다. 비록 우리 집은 서울 한복판에 있었지만 세 살 무렵까지는 서울대공원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관악산과 보라매공원이 집에서 멀지 않았다. 어릴 때 찍은 사진에는 늘 보라매공원의 노란색, 빨간색 튤립이 배경으로 함께했다. 어려서 산에 잘 오르지 못했을 때, 아버지는 내 허리에 줄넘기를 묶어 나를 끌고 관악산을 오르곤 했다. 그로부터 15년 후, 나는 식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식물의 보존을 위한 작업

평생 식물만 보고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느냐는 아버지의 말에 용기를 얻어 원예학과에 진학했다. 학교에서는 식물생리학, 형태학 등 기초 식물학에 관한 수업 외에 조경 드로잉이나 원예 디자인 등 식물을 활용하는 데 필요한 수업을 들었다. 3학년 즈음의 수목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과제 하나를 주셨다. 한 학기 동안 학교 안에 있는 나무들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그려 나무 그림 도감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게 아마 내가 그린 첫 식물세밀화였을 것이다. 그 후에도 식물생리학, 조경학 등의 수업에서 식물을 그림으로 그릴 일이 많았고, 식물을 관찰해 그리는 일이 좋아 식물 그림 그리는 분을 사사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식물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한 건 국립수목원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국립수목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식물 연구기관 중 하나로,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식물세밀화를 가장 처음 수집한 국내 식물세밀화의 보고와도 같은 곳이다.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그곳에서 나는 연구자들이 전국에서 수집한 식물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이름이 없는 새로운 종이나 그림 기록이 없는 종들을 그렸다. 그렇게 기록된 그림은 학회에 발표되어 공식적으로 식물의 존재를 알리거나, 사람들이 식물을 식별할 수 있게 하는 식물도감의 삽화로 활용됐다. 종종 식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전시와 교육, 굿즈 등에도 쓰였다. 모두 궁극적으로는 식물의 보존을 위한 일이고, 식물의 형태를 기록한 연구 데이터베이스로 활용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수목원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식물학자들과 함께 일했다. 식물분류학자, 생태학자, 조경학자, 원예학자뿐만 아니라 식물을 매개로 하는 다른 생물들, 버섯이나 곤충을 연구하는 동물학자들이 늘 곁에 있었고 덕분에 자연을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지금 나는 국립수목원을 나와 학교에서 식물세밀화를 연구하고 있다. 식물을 그리는 화가가 무슨 연구를 하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식물세밀화는 아직 시작 단계라 모든 것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관련사진

1 이소영 식물세밀화가의 작업 모습.

2~4 이소영 식물세밀화가가 그린 큰지네고사리, 진노랑상사화, 약용식물.

식물은 내 운명

나는 식물세밀화를 그리는 사람이지만 ‘식물세밀화’라는 용어가 내가 그리는 식물 일러스트 혹은 식물학 그림에 적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식물세밀화에 관한 용어를 정리하고 종의 보존을 위해 그리는 그림 기록으로서의 식물세밀화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연구하는 일은 현재 우리나라의 식물세밀화가가 해야 할 또 다른 역할이다.
식물세밀화가로 지낸 10여 년의 시간 동안 공기 오염, 식량·에너지·물 부족 등의 위기로 인해 우리나라 정부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식물과 식물세밀화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몰랐던 식물세밀화가가 한두 명씩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고, 교육과정도 생겼다. 더불어 식물문화와 관련 산업이 확장되어 식물세밀화의 활용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식물세밀화의 이미지만 보고 작업을 제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식물세밀화의 궁극적인 목적인 식물종의 보존에 해당되지 않는 작업은 앞으로도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직 정립되지 않은 문화와 산업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막연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농촌진흥청 연구자들이 육성한 신품종 과수, 채소, 화훼 작물들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육성한 신품종 포도를 그리는 중이다. 포도에도 다양한 품종이 있는데, 품종마다 수확되는 시기, 맛, 식감이 모두 다르다. 어떤 건 생과로, 어떤 건 주스로, 어떤 건 통조림용으로 모두 다르게 활용된다. 다양한 품종을 소비할 때 생물다양성 또한 유지될 수 있다. 식물세밀화가 이러한 다양한 종의 존재를 알리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가 되길 바란다. 더불어 일본 등지에 로열티를 지급할 필요 없이 우리나라에서 육성한 품종을 많이 이용하면 좋겠다.
평소 아무도 하지 않는 직업을 가져서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물론 꿈꾸는 미래를 안내해줄 선배도, 조언을 얻을 만한 동료도 없어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나는 그래서 더 큰 열정을 가질 수 있고, 끊임없이 꿈꿀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산을 넘고, 수개월간 관찰하고, 밤새 선을 긋는 일 따위는 전혀 힘들지 않다. 아마도 그 대상이 ‘식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사진 제공 이소영 식물세밀화가·식물학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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