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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전시 <마르셀 뒤샹: The Essential Duchamp>과 <키스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전시들
얼마 전 휴가로 영국을 다녀왔다. 영국에 가면 런던의 공공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에 여러 번 들른다. 나에겐 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학교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가면 늘 전시장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어린이들이 있다. 말을 시작한 꼬마들도 더듬더듬 감상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한국은 어떻게 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휴가 동안 약간의 사심으로 영국의 큐레이터들을 인터뷰했다. 그들에게 “당신이 예술을 처음 만난 때가 언제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모두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미술관에 갔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30대 초반인 그들이 영국 유수의 미술관에서 감각적 전시를 기획하며 능력을 발휘하는 배경엔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을 열어준 다양한 문화적 기회가 있었다. 이런 영국의 기억들을 마음속에 품고 전시 프리뷰로 선택한 주제는 ‘1월, 어린이와 청소년이 꼭 봐야 할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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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뒤샹,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자기(磁器) 소변기, 30.5×38.1×45.7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125th Anniversary Acquisition. Gift (by exchange) of Mrs. Herbert Cameron Morris, 1998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좌절과 오기가 만든 예술<마르셀 뒤샹: The Essential Duchamp> 2018. 12. 22~2019. 4. 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 2 전시실

현대미술의 문을 연 마르셀 뒤샹의 작품 전반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다. 이 전시를 꼽은 이유는, 남과 다른 생각을 체계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이 시대의 생존 조건이기 때문이다. 특이한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보편성을 갖추면 변화가 일어난다. 뒤샹은 이 남다른 생각을 파격적으로 설득해 미술사에서 살아남았다.
뒤샹도 10대 때는 한국의 ‘입시 미술’ 학원 격인 파리의 사설 미술학교에 다녔다. 그도 처음에는 <블랭빌 교회>(1902)에서처럼 인상파를 흉내 내며 길을 모색했다. 그러다 파리 화단을 중심으로 부상하던 ‘입체파’를 따라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그린다. 이 작품을 <앙데팡당>전에 냈지만 입체파 섹션 전시에서 거절당한다. 충격을 받은 뒤샹은 그 길로 그림을 택시에 실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더 이상 입체파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뒤샹은 기존 그림의 규칙을 깬 입체파의 논리를 더 밀고 나가 아예 회화 자체를 거부한다. 그 결과 <병걸이>(1914)를 가져다 사인을 하고 작업실에 놓았다. 기존에 있던 공산품을 그대로 예술 작품화한 ‘레디메이드’다. 이 중 하나가 바로 사인한 변기, <샘>(1917)이다.
이렇게 보면 <샘>은 좌절과 실패의 오기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런데 1923년 예술을 그만두고 체스 선수가 된 그를 뒤늦게 조명한 건 미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술의 중심지가 미국으로 옮겨가고, 회화에 염증을 느낀 작가들이 ‘레디메이드’를 활용했다. 입체파가 그림 속의 시점을 다양화했다면, 거기서 더 나아가 예술의 장르를 회화 밖으로 확장하는 물꼬를 뒤샹이 터준 셈이다.
짧은 예술 활동 기간만큼 작품이 많지 않다. 많은 난해한 말을 남겼지만 가장 중요한 건 과감성과 반골 기질이다. 오죽했으면 요셉 보이스가 존경했던 뒤샹을 직접 만나고 ‘과대평가했다’며 실망을 했을까. 텍스트를 꼼꼼히 보며 심오한 의미를 찾으려 하기보다, 일단 눈으로 작품을 보자. 거절당한 청년의 오기와 도전성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전시가 될 것이다.

우리 곁의 현대미술<키스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2018. 11. 24~2019. 3. 17,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1980년대 뉴욕은 개인의 욕망이 폭발했던 독특한 시기다. 이 시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예술가들은 주로 거리에서 활동했다. 키스 해링과 장 미셸 바스키아가 그 주인공들이다. 그중 키스 해링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가즈오 나카무라의 컬렉션을 서울에서 볼 수 있다. 이 전시를 꼽은 이유는 개념적인 뒤샹의 작품과 달리, 키스 해링의 작품은 좀 더 시각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기적으로도 뒤샹보다 현대에 가까우니 어린이와 청소년의 감성을 열어주기에 더 좋을 것 같다.
이 전시를 아이와 함께 찾는 부모가 있다면 꼭 당부하고 싶은 점이 있다. 아이가 감상과 느낌을 말할 때 ‘맞다/틀리다’를 유도하기보다 그 느낌 자체를 더 구체적으로 자유롭게 얘기하도록 도와주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 작품 앞에 서면 정해진 답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입을 다문다. 가끔 긴장과 어색함을 감추려고 ‘이건 나도 그리겠네!’라는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건 영국 미술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술에 익숙한 사람들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감상을 얘기하지만, 낯선 사람들은 스스로 주눅 들고 만다.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 키스 해링의 작품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미술계로 편입됐다.
우선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작가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지 느껴보자. 무명의 화가가 지하철을 다니면서 빈 공간에 그림을 그릴 때, 뉴욕시민들의 눈길을 끌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왜 이런 그림을 그려야 했을까. 그렇게 출발점을 잡으면 더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
장 미셸 바스키아나 사이 톰블리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키스 해링만의 특징이 더 명확하게 느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키스 해링 작품의 의미를 픽토그램의 단순함이 주는 상징성과 폭발성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러나 다른 생각도 언제나 환영이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 현대미술이 우리와 더 가까워질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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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키스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전시 전경.

글 김민 동아일보 기자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디자인재단·GNC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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