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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메릴 스트립의 수상 소감과 이 시대 문화예술의 역할 슬픔과 아픔이 예술로 승화될 때
미국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배우 메릴 스트립이 남긴 ‘소신 발언’ 수상 소감이 화제다. 남성우월주의와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매서운 일침은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양성이 공격받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착오적 상황에서 예술과 예술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근원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이슈&토픽 관련 이미지1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전하고 있는 메릴 스트립.
유튜브 화면 캡처.

이슈&토픽 관련 이미지2, 3 영화 <엘리펀트 맨>.

영화를 통해 얻은 용기와 위안

영국에서 좀 늦은 나이에 공부할 때 무척 외로웠다. 영화가 즐거움이자 위안이었다. 런던 도심에 있는 BFI 사우스뱅크를 주말마다 찾았다. BFI 사우스뱅크는 시네마테크다. 세계의 여러 고전영화나 최신 예술영화를 상영한다. 이곳에 들렀다 하면 두세 편의 영화를 내리 봤다. 조그만 TV 화면으로는 긴가민가하며 봤던 <시민 케인>(1941)의 딥 포커스 효과를 스크린으로 체험할 때,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가 품은 장쾌한 스펙터클을 큰 화면으로 확인할 때, 젊은 안성기가 심산의 암자를 태우는 장면이 담긴 <만다라>(1981)의 진가와 마주할 때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평생 영화관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의 8할을 BFI 사우스뱅크에서 느꼈다.
다니던 대학이 있던 도시 브라이튼에도 주중 밤에 자주 찾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었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 낡았으나 고풍스러웠다. 매점을 겸하는 작은 매표소 앞은 밤마다 붐볐다. 영화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돼 문을 연 극장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다 보면 시간을 초월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런던에서든 브라이튼에서든 극장을 다녀오면 고독의 농도가 옅어졌다. 하지만 정작 극장 안에서는 외로웠다. 예술영화를 찾는 아시아인은 나 혼자였다. 노란 머리, 빨간 머리, 갈색 머리들 사이에 섞여 눈만 반짝였다. 영화는 위로를 안기는 동시에 내가 겪고 있는 고독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어느 일요일 낮,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 맨>(1980)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객석은 언제나 그렇듯 백인들로 꽉 차 있었다. 평소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아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데, 옆에 앉은 30대 여인이 말을 걸었다. “<엘리펀트 맨>을 처음 보냐”고 내게 물었다. 자기는 예전에 TV로 본 적이 있는데 큰 스크린으로 보고 싶어 극장에 왔다고 했다. 설렘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크게 웃는 입 사이로 비어 있는 이 두어 개가 보였다. 그녀의 고단하고 빈곤한 삶이 엿보였다.
<엘리펀트 맨>은 코끼리를 닮은 외모로 평생을 고통스레 살아야 했던 한 남자를 이야기 중심에 두고 있다. 서커스단에서 짐승 취급을 받던 ‘코끼리 남자’는 한 의사와 독지가 여인을 만나면서 인간의 정을 깨닫고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코끼리 남자’는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다 호기심 어린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자 “나는 인간이에요”라고 처절하게 외친다. 이 영화의 주제를 뚜렷이 드러내는 말이다. 생김새가 달라도, 취향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이념이 달라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인간을 인간으로 받아들여 달라는 외침이다. 아마 앞의 30대 여인은 ‘코끼리 남자’의 불우와 자존을 보며 가난한 삶을 견뎌낼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영국인들 사이에서 투명인간처럼 지내던 나는 다음날을 맞을 힘을 얻었다. 보편적인 인간애를 보여주는 <엘리펀트 맨>을 관람하며 영국의 한 여인과 극동에서 온 이방인은 잠시나마 엷은 연대감을 형성했으리라.

메릴 스트립의 수상 소감과 할리우드의 다양성

지난달 미국의 명배우 메릴 스트립이 미국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인 세실 B. 드밀상을 받으며 남긴 수상 소감은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예술의 역할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메릴 스트립은 소감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당시는 취임 전이었다.)을 몰아붙였다. 외국인과 여성, 유색인을 향한 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세계 최고 권력자를 향한 매서운 일침이었다. 그는 “할리우드에는 아웃사이더와 외국인들이 넘쳐난다”며 “그들을 다 쫓아낸다면, 미식축구와 종합격투기 말고는 볼 게 없을 것이다. 그건 예술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다양성을 근간으로 할 수밖에 없는 예술의 속성이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인식 때문에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이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이질적인 요소의 결합에 따른 진화의 역사였다. 할리우드는 곧잘 이민자의 수혈을 받거나 해외 영화인을 스카우트하며 문화상품으로서의 영화의 질을 높여왔다. 무성영화 시대 흑백의 은막을 수놓았던 그레타 가르보는 스웨덴에서 활동하다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아 뭇 남성의 연인이 됐고,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루돌프 발렌티노는 20세기 초반 많은 여성의 마음을 울린 할리우드의 별이 됐다. 1930년대 스크린 여신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독일 출신이다. 배우뿐 아니다. 스릴러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은 영국에서 나고 자라 감독이 돼 재능을 발휘했고,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렸다. 독일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게오르그 빌헬름 파프스트, 프리츠 랑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에 품격을 더해주었다.
사회적 불이익에 굴하지 않는 성적 소수자가 많은 것도 할리우드의 특징이다. 커밍아웃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던 시절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던 배우들이 적지 않다. 1985년 에이즈로 숨지기 직전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힌 록 허드슨이 대표적이다. 1950년대 스크린에서 남성미를 과시했던 그가 나중에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해도 그의 영화적 업적은 변하지 않는다. 메릴 스트립이 말했던 아웃사이더엔 성적 소수자가 포함돼 있을 것이다. 소수자로 살며 얻은 마음의 상처에 그들의 감수성은 예민해졌을 것이고 창의력의 발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슈&토픽 관련 이미지1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이 함께한 ‘블랙리스트 버스’ 참가자들이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문화적인 표현과 방식을 통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을 촉구했다.

획일화의 광풍 속에서 살아남은 문화예술

할리우드에선 한때 이념의 획일화 바람이 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래한 동서대립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수장들에게 눈에 거슬리던 ‘불순분자들’을 몰아낼 맞춤 도구가 됐다. 스튜디오의 수장들은 1940년대 후반 파업 사태를 겪으며 문제 영화인들을 정리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강대국 소련의 부상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한국전쟁의 발발은 매카시즘 광풍을 일으켰고 스튜디오의 눈엣가시였던 영화인들은 할리우드 밖으로 밀려났다. 스튜디오가 밀고한 영화인들은 ‘하원비미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HUAC)’에 불려가 사상 검증을 받았다. 그들은 사상의 자유를 위해, 또는 동료가 누명 쓰는 것을 원치 않아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위원회 활동에 반감을 드러냈다가 불이익을 당했다. 미국 서민의 정서를 대변하던 배우 존 가필드는 HUAC에서 묵비권을 행사한 뒤 사람들의 비난에 시달리다 39세에 심장병으로 숨졌다. 할리우드의 채용 기피 인물로 낙인찍힌 영화인 다수는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망명 영화인들은 유럽 영화계에서 활동하면서 전후 유럽 영화의 부흥에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미국에 남은 기피 영화인들은 가명으로 또는 익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스튜디오는 마음에 들지 않던 영화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줬지만 그들의 재능 없이는 사업을 영위할 수 없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인들을 은근슬쩍 채용해 영화를 만들고 돈을 벌었다. 11개의 가명을 활용해 시나리오를 쓰고, 남의 이름으로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지난해 개봉한 영화 <트럼보> 참조)의 기괴한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아픔은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다

20세기 중반 할리우드에서 벌어진 수난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더욱 악랄한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지난 세기 할리우드에선 업계가 채용 기피 인물에 대한 리스트를 몰래 만들었다면, 21세기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불이익을 받아야 할 대상의 목록 작성을 주도했다. 이념이나 지역이나 성별에 따라 국민을 차별해서는 안 될 정부가 국가 지원 배제 명단을 만들어 예술을 길들이려 했으니 더 악성인 블랙리스트다.
5년 전 권위주의 국가 베트남과 미얀마를 잇달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특강이 예정된 한국 영화인들과 함께한 출장이었다. 베트남과 미얀마의 영화인들은 아시아의 영화 선진국 한국으로부터 앞선 영화 기술과 축적된 영화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고 싶어 했다. 특강에 나선 이준익 감독은 짧고 명확하게 말했다. “어떤 첨단기술이나 대자본도 필요 없다. 검열을 없애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 그러면 영화산업은 발전한다. 한국은 1996년 위헌결정으로 사전심의가 사라졌다. 그 뒤 영화가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 감독의 발언을 들으면서 자리에 있던 한국 영화인들은 뿌듯하면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행사를 공동주최한 베트남과 미얀마 정부기관 관계자들의 심기를 건드릴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기우였다. 관계자들은 특강 참석자들과 더불어 박수를 치며 이 감독의 주장에 동의했다. 여러 이유로 검열을 하면서도 표현의 자유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민주화를 바탕으로 사전심의제도를 폐지시킨 한국의 과거가 자랑스러웠고, 저항으로 얻은 표현의 자유가 흔들릴 거라고 그때는 의심하지 않았다. 요즘 블랙리스트 보도를 잇달아 접하다 보면 오랫동안 많은 희생으로 얻은 자유가 신기루로 느껴진다.
메릴 스트립은 골든 글로브 시상식 수상 소감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최근) 세상을 떠난 내 소중한 친구 레아 공주(캐리 피셔)는 내게 ‘너의 아픈 마음을 예술로 만들어라’라는 말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블랙리스트 파문은 미래 예술을 위한 자양분이다. 그래야 하고 그래야 한다고 믿고 싶다.

이슈&토픽 관련 이미지2 정치적 이유로 11개의 가짜 이름으로 활동해야 했던 할리우드 천재 작가 달톤 트럼보의 실화를 그린 영화 <트럼보>.
3 마이클 무어 감독은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의 IFC 센터에서 트럼프를 풍자한 다큐멘터리 <트럼프랜드의 마이클 무어>를 공개했다.

글 라제기_ 한국일보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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