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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29그들이 역사에 지은
평화와 평등과 자유의 농사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

청명·한식에 곡우가 들어 있는 달, 4월.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뜻하고 비가 내려 비로소 밭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때. 찬밥을 먹기에 나쁘지 않은 한식을 보낸 뒤 만나게 되는 4월… 그냥 4월이 아니다. 1960년, 우리가 그저 ‘사일구’라고 하는 날. 학생의거에서 학생혁명까지 의미를 정의하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그날이 거기에 있다.
1960년 4월에 나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설악산 아랫동네의 자그마한 여자중학교 학생.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때, 고등학교 학생회장 언니가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문리 시장까지 행진을 하게 했다. 언니가 구호를 선창했고 우리는 그 의미도 모른 채 따라서 소리 치고 그저 킥킥대며 삐뚤빼뚤 줄을 서서 시장으로 갔다. 장거리의 여러 골목. 공연히 할머니의 채소가 든 함지를 발로 툭툭 차기도 했다. 하여간 김일성 괴뢰도당을 물리치자고, 북진통일을 외치게 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어쩌고저쩌고 했다나?
이후 해가 바뀌고 이른 여름이 올 때, 다시 무언지 몰라도 군인들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일이 생겼다. 텔레비전이란 것이 있다는 소문도 들어보지 못했고 안방 벽에 붙여놓은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연속극을 듣는 용. 《동아일보》를 보긴 했어도 한자가 많았으니 그것도 어른용이었다.
하여튼 무지無知도 죄라지만 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도 모른 채 살다가 1980년대 초반부터 수유리 4·19 민주묘지와 가까운 곳에 살게 됐다. 수유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묘지가 있는 곳으로 가는 2차선 도로엔 이상한 기운이 늘 서려 있었다. 그 위의 산골짜기와 산기슭에 손가락으로 한참을 꼽아야 되는 애국자들의 묘지가 있어서일까? 아니다, 골목 오른쪽 산기슭에 자리한 4·19 희생자들의 묘지 때문이다. 그곳에는 비일상적,비상식적 기운이 감돈다고 느꼈다. 묘역에 가면 초라하고 소박하고 서럽고 불쌍한 느낌이 가시지 않게 하는 봉분 없는 묘비석. 이름이 씌어 있는 묘지의 주인들은 경무대·중앙청·광화문·종로·내무부·시청·서대문 이기붕 집 앞 등지에서 ‘총상’이나 ‘곤봉부상’으로 그날 사망했다. 부산·마산·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 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어른들. 그리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이맘때, 경상도 억양이 강한, 체육관 대통령이 청와대에 살고 있었다. 수유리 근처, 화계사와 가까운 곳, 한신대학교와 천주교 성당의 지하 공간에선 알음알음으로 사람들을 모아 ‘광주의 학살’ 현장을 찍은 금기의 필름을 보여주었다. 이 기록물을 보고 어두운 공간에서 밝은 거리로 나오면, 국민이라는 내 존재가 현실로부터 괴리되었고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해마다 4월은 왔고 사일구도 다가왔다. 수유사거리부터 아카데미하우스가 있는 거리엔 4월 초순부터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로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정신 등의 글자가 적힌 현수막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가로수엔 민주 단체와 대학에서 만든 포스터, 표어들이 바쁘게 붙여졌다. 이때다 싶어 이름을 알리는 정치인들도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볕이 바르지만 슬픔은 무겁게 가라앉아 여전히 추운 그곳, 미리 제수를 만들어 묘지 참배를 하는 유족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고 그 중에 허리 굽은 소복 차림의 머리 하얀 할머니. 아마 억울하고 서럽고 원통한 세월을 살아내느라 미리 그리 된 어머님이지 않을까. 사일구 당일엔 최루탄을 쏘고 학생들이 군부독재 타도를 외쳐, 이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으니까. 어린 학생들은 이날 하루 등교하지 않았다.
4월 18일. 가까운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마라톤을 했다. 구호를 외치고 달리는 대학생들. 길가에는 팔짱을 끼었거나 무전기를 든 장정들이 보였다. 백골단? 사복 경찰? 정보원? 아직 수배 중인 학생과 노동운동 쪽의 아무개들을 찾고 있을 눈초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1963년 박정희 군부 정권에서 조성한 4·19기념 묘지는 그 후 30년이 지난 1993년 김영삼 정부에서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2006년 ‘국립 4·19 민주묘지’로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묘역 B구역엔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잘 아는 김주열 학생. 그의 흑백 명함판 사진이 묘비 왼쪽 위에 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올랐던 학생. 그의 죽음은 이렇게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어리고 푸르른 청춘들. 그들이 역사에 선혈로 남긴 평화와 평등 자유의 정신은 영원할 것이다.
기념탑의 글 중 일부를 옮긴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6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글·사진 이경자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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