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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책 <일간 이슬아 수필집>과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생존이 글이 될 때, 21세기 SNS의 셰에라자드
이슬아는 ‘별종’ 같은 작가다. 그럴듯한 작품도, 내세울 수상 경력도 없다. 그런 그가 플랫폼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와 직거래하겠다며 ‘일간(日刊) 이슬아’ 연재를 시작했다. 무모한 도전은 뜻밖의 성공을 거뒀다. 많은 독자들이 기꺼이 선금을 지불하고 매일 밤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의 이야기는 독립출판물 <일간 이슬아 수필집>으로 출간됐다. 어머니 복희와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책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도 함께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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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안 청탁했지만 쓴다, 성공한 셀프 연재<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지음

“태산 같은 학자금 대출! 티끌 모아 갚는다. 아자! 아무도 안 청탁했지만 쓴다!”
6세기 페르시아의 셰에라자드는 왕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냈다. 셰에라자드가 자신의 생을 연장하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21세기 한국의 이슬아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매일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런 사정으로 시작된 ‘일간 이슬아’는 올해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는 불안정한 연재 노동자로서 안정적 수입을 얻기 위해 독자에게 선금 1만 원을 받고 편당 500원에 자신의 이야기를 팔았다. 자정 무렵 메일로 배달된 그의 이야기는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에게 재미와 위로를 주었다. 셰에라자드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듯이 그는 학자금 대출 2,500만 원을 모두 갚았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의 이야기는 밑천이 떨어지는 법이 없다.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때로는 솔직하게, 때로는 능청스럽게 풀어내는 걸 보면 까도 까도 속살이 계속 나오는 양파를 보는 듯하다. 솔직하고 당당하지만, 센 척하거나 과시하지 않고 담담히 20대 여성의 불안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친구와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 어머니 복희와 아버지 웅이의 이야기, 글 쓰고 일하는 이야기 등 잔잔한 물결처럼 아무렇지 않게 풀어놓은 이야기가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온다.
그는 산부인과에서 피임 시술을 받으며 산부인과 주치의와 ‘우정’을 쌓는가 하면, 연금보험 가입을 권하는 이모와 외숙모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피임 시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슬아는 참 자유스럽구나”라는 외숙모의 말에 속으로 “임신의 가능성으로부터, 연애의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돈으로부터, 그 밖의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며 “오히려 너무 안 자유로워서 받은 시술”이라고 생각한다.
이슬아가 풀어놓는 많은 이야기 중 가장 큰 밑천이자 인상 깊은 에피소드는 어머니 복희와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별도로 웹툰으로 연재해 책으로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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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복희와의 따뜻한 우정<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이슬아 지음, 문학동네

“우리는 서로를 선택할 수 없었다. 태어나보니 제일 가까이에 복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몹시 너그럽고 다정하여서 나는 유년기 내내 실컷 웃고 울었다. 복희와의 시간은 내가 가장 오래 속해본 관계다. 그가 일군 작은 세계가 너무 따뜻해서 자꾸만 그에 대해 쓰고 그리게 되었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의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복희는 어떤 엄마이길래 딸이 한없이 머물고 싶은 세계를 일구어냈을까. 복희가 따뜻하다는 것은 통상적 의미의 헌신적 모성을 넘어선다. 복희는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어머니지만, 그 대가로 자식을 통제하고 구속하지는 않는다. 복희는 딸이 누드모델로 일하겠다고 얘기했을 때, “뭐라고?”라며 소리치는 대신 “무엇을 준비해야 해?”라고 묻는 사람이다. “알몸이 되기 전에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이 최대한 고급스러웠으면 해”라며 자신이 운영하는 구제 옷 가게에서 가장 좋은 코트를 건네주는 사람이다. 허용적이고 포용적인 복희와의 관계는 부모 자식 관계를 넘어 우정에 가깝다.
이 책은 1960년대생 여자와 1990년대생 여자가 겪은 노동의 역사이자 돈벌이의 역사이기도 하다. 가난 때문에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을 내지 못해 꿈을 접었던 복희는 소주병을 들고 다락방에 올라갔다 3일 만에 퉁퉁 부운 눈으로 내려와 일자리를 구한다. 경리, 닭갈비집 직원, 구제 옷 가게 주인 등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위해 돈을 번다. 1990년대생 이슬아도 돈벌이에서 자유롭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학자금과 월세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돈을 버는 데 쓰는 시간이 아까워 시급 3만 원인 누드모델에 지원한다. 3년 동안 누드모델로 일한 이슬아는 그림 강사가 자신의 ‘궁둥이’를 언급한 날 백화점 화장실에서 눈물을 쏟지만,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으며 서러움을 떨쳐버린다.
자신의 꿈을 접고 힘겹게 노동하는 부모를 보았기 때문일까. 이슬아는 악착같이 일하면서도 글을 쓰는 자신의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 한다. 두 권의 책은 그런 이슬아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출간한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4쇄,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는 3쇄를 찍었다. 그의 잠재력은 허허벌판에서 성공적으로 연재 독자를 모집했을 때 증명되었다. 생계형으로 시작했지만 ‘작가 이슬아’의 경력은 이미 굵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글 이영경 경향신문 기자
사진 제공 이슬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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