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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한국 교향악의 역사와 더 채워갈 것들 교향악의 봄에
일본은 서구 교향악의 절정기에 서양음악을 수용하면서 1900년대 무렵 서양음악 용어를 번역하고 음악 학교 설립과 오케스트라 결성을 활발히 했다. 공공장소에서 다수의 청중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교향악이 공동체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한국 역시 교향악의 발전에 노력했는데, 한편으로는 아직도 교향악을 사명감의 대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무엇을 위한’ 음악이 아닌, 우리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지닌 음악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장윤선의 음악 정원으로 관련 이미지1, 2, 3 2016 교향악축제가 지난 4월(4. 1~22)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됐다. ‘스물여덟 번째 봄’이라는 부제로 전국의 19개 교향악단이 참여했다. 사진은 KBS교향악단 (지휘 요엘 레비· 협연 피아노 백혜선, 사진1, 2)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지휘 임헌정· 협연 클라리넷 김현곤, 사진3)의 공연 장면.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으로 시작하는 ‘동무생각(思友)’은 이은상(1903~1982)의 시에 박태준(1900~1986)이 곡을 붙인 초창기 우리 가곡으로, 도입부의 가사는 매년 봄 열리는 ‘교향악 축제’ 시기가 되면 자주 인용되곤 한다. 올해도 ‘스물여덟 번째 봄’이라는 부제로 지난 4월 전국의 19개 교향악단이 참여해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에게 ‘봄의 교향악’ 이미지를 전해준 ‘동무생각’은, 한반도에 교향악이라는 서양음악 장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인 1925년에 창작된 노래다.
‘교향악(交響樂)’은 서양음악 용어 ‘심포니(Symphony)’의 한자어 번역으로, 일찍이 1880년대에 독일로 유학했던 메이지 시기 일본의 군의(軍醫)이자 문예가 모리 오가이(森外, 1862~1922)가 옮긴 말이다. 서양음악 연주를 직접 들을 기회가 적었던 당시에는 먼저 번역 문헌을 통해 음악을 알게 되는 경우가 흔했다. 1888년 메이지 정부가 전문 음악가 양성을 목표로 도쿄음악학교를 개교한 이래, 서양 용어의 번역 작업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렇게 만들어진 용어들은 음악보다 빠른 속도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널리 공유됐다.

‘공동체’의 이상과 밀접한 독일 교향악, 그리고 일본과 한국

일본 근대화 초기인 19세기 중후반 동시대 서구 음악계에서, 교향악은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위상을 높여가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오랜 기간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느슨한 연합 아래 수백개의 서로 다른 지배 체제로 나뉘어 있던 이른바 ‘게르만인’은 통합된 국민 국가로서의 ‘독일’을 구체화해가는 과정에서 교향악을 중요한 매체로 여기게 되었다. 교향악은 공공장소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청중을 대상으로 연주한다는 점에서, ‘공동체’ 실현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최적의 장르로 받아들여졌다. 1810년 독일 튀링겐 주에서는 최초의 교향악 축제가 열렸고, 이후 교향악 중심의 음악 축제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서구 교향악의 절정기에 서양음악을 수용한 동아시아에서 독일어권 교향악이 우위를 차지한 것은 필연적 흐름이었다. 일본에서는 1900년대 초부터 이미 주요 대학마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설치되었고, 1910년대에는 야마다 고사쿠(山田耕, 1886~1965) 등 1세대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오케스트라 운동’을 통해 교향악단 결성 움직임이 빨라졌다. 1920년대 중반 일본 최초의 전문 오케스트라이자 NHK교향악단(N향)의 전신인 ‘신교향악단’의 설립을 이끈 고노에 히데마로(近衛秀, 1898~1973)는 학생 시절부터 베토벤 교향곡 지휘를 꿈꾸며 악보를 수집해 여러 차례 사보, 분석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N향의 수석지휘자 파보 예르비(Paavo J rvi, 1962~)는 작년 연말 한 인터뷰에서 “N향은 독일 음악 연주의 전통을 갖고 있는 훌륭한 오케스트라”라고 말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교향악단을 가리켜 독일의 연주 전통을 언급하다니 얼핏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독일의 작품을 모범으로 삼았던 일본의 서양음악 수용 역사와 아울러 N향이 당초부터 추구해온 독일 교향악 계승이라는 방향성을 감안하면 적절한 찬사에 해당하는 셈이다.
서양음악 수용 초기 한반도에서도 교향악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홍난파(1898~1941)는 “경성에서도 하루바삐 교향악단 창설 운동이 일어나기를”(<동아일보>, 1939년 3월 30일) 바랐으며, 프로 오케스트라가 없는 당시 상황을 “문화도시인 경성 시민의 치욕”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음악 평론가 김관(1910~1946)은 ‘교향악단의 대망(待望)’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교향악은 가장 복잡한 사회조직을 가진 국가 형태에 비교할 수 있다”(<매일신보>, 1939년 4월 23일)라고 썼는데, 그야말로 교향악을 공동체 구현으로 여긴 19세기 독일 정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한국의 교향악’은 무엇일까

교향악단을 향한 초창기 음악인들의 염원이 무색할 정도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쟁쟁한 연주자들로 구성된 크고 작은 교향악단이 다수 활동하고 있다.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던 동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그렇듯, 우리나라에서도 주요 교향악단의 관리와 운영을 지방자치단체 단위에서 주로 담당하고 있다. 매년 교향악 축제에 참여하는 교향악단만 보아도 몇몇을 제외하면 대체로 ‘시립’ ‘도립’ ‘구립’ 형태로 공공기관에 소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이들 교향악단에는 해당 지역의 대표 또는 더 나아가 대한민국 대표로서의 역할이 기대되기도 하고, 협연하는 연주자나 지휘자 중에는 서양에서 활약하며 ‘한국을 빛낸’ 경력을 부각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서구 교향악의 역사가 공동체 이념 표현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전개되어온 맥락을 고려하면, 우리 사회가 서양음악 연주자나 단체에 부여하는 ‘국가대표’성이 마냥 엉뚱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음악 인구가 늘고 음악계의 저변이 확대되는 데 비해, 아직도 근대화 시기처럼 교향악을 당위성이나 사명감의 대상으로 대하는 경향이 짙은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스물여덟 번째 ‘봄의 교향악’이 마무리된 시점에, 이제는 지난날과 같은 교향악의 양적 성장이나 성과주의를 따르기보다는, 한국에서 교향악이 갖춰야 할 본질적 의미와 역할을 논의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면 좋을 듯하다.문화+서울

글 장윤선
대학과 대학원에서 음악사를 전공하고 ‘근대 일본의 서양음악 수용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사진 제공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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