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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책 <분홍나막신>과 <헛디디며 헛짚으며> 삶을 탁월하게 짚는 고수의 시어
‘강호(江湖)의 고수’는 이들에게도 딱 어울리는 말이다. 최근 신작 시집을 낸 송찬호?정양 시인. SNS를 통해 감각적인 ‘요즘 시’들이 각광받는 때, SNS와는 거리가 먼 고수의 시어에서는 삶을 통찰하는 속 깊은 상상력과 익살을 맛볼 수 있다. 시인들의 시인이 건네는 언어에 귀 기울여보자.

분홍나막식 송찬호 시집

이즈음 세상에도 백이숙제처럼 초야에 묻혀 세상으로부터 숨는 일이 가능할까. 기침 한 번 크게 해도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라도 빛의 속도로 전 세계에 그 사실을 전파할 수 있는 시대여서 은거한다는 의미는 다르게 해석해야만 할 것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닫고 각종 매체로부터 스스로 소외당해야 비로소 어느 곳에 있든 그곳이 백이숙제가 들어간 수양산이 될 것이니 말이다. 최근 연달아 시집을 낸 송찬호 (57)·정양(74) 시인은 강호에 은거하는 시인으로 평판이 높다. 나이 차이는 훌쩍 나지만, 지방에 살면서 이른바 ‘중앙 문단’ 행사나 술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SNS 같은 소통 수단과는 아예 처음부터 담을 쌓은 이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럼에도 이들이 생산하는 시는 범(汎)문단의 지지를 받는 명품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송찬호 시인은 1987년 <우리시대의 문학> 6호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충북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한 적이 없다. 그곳에 자신이 직접 통나무집을 5년에 걸쳐 지어놓고 중심을 삼았다. 운전면허가 없는 그는 인근 상주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나갔다가 터미널에서 바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일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다. 해외여행도 그의 취미는 아니다. 그렇게 살아도 전혀 따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단조롭고 권태로운 일상을 그는 누구보다 잘 견딘다고, 그래서 그의 아내조차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우석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직한 정양 시인은 지역에 뿌리내린 상징적인 문인이다.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50년 가까이 시업을 이어온 정 시인은 전북 지역의 토박이 문인이다. 최근에는 아들이 살고 있는 경기 용인으로 노부부가 거처를 옮기긴 했어도 오랜 세월 쌓아온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난 3월에는 아예 지역(전북 전주) 문인들이 출자해 만든 출판사에서 첫 번째로 시집을 내기도 했다. 안도현, 김용택, 유강희 시인 등 20여 명이 십시일반 돈을 보태 만든 출판사 ‘모악’ 시인선 1번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현실에 접한, 허를 찌르는 상상력
<분홍나막신>, 송찬호 지음, 문학과지성사

강호의 시인들이라는 점만으로 이들을 거론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시인들이야 찾아보면 적지 않을 터이지만 그들이 모두 빼어난 작품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송찬호는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힐 뿐 아니라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김수영문학상 같은 굵직한 상을 휩쓴 고수다. 그가 7년 만에 펴낸 5번째 시집 <분홍나막신>(문학과지성사)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대여, 내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 멀리 나를 찾아온대도/ 이번 생은 그런 것 같다/ 피는 벌써 칼을 버리고/ 어두운 골목으로 달아나버리고 없다// 그대여, 내 그토록 오래 변치 않을 불후를 사랑했느니/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 아래/ 붉은 저녁이 오누나/ 장미를 사랑한 당나귀가/ 등에 한 짐 장미를 지고 지나가누나”(<안부>)
생의 고통을 사이렌 소리로 환치시킨 감각이 인상적이다. 지적인 성찰로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시인으로 각광받아온 송 시인의 이런 감각적인 작품은 다소 뜻밖이고 뜨겁다. 이번 시집에 이런 감각의 시들만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천둥을 흙 속에 심어놓고/ 그게 무럭무럭 자라/ 담장의 장미처럼/ 붉게 타오르기를 바랐으나// 천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로만 훌쩍 커/ 하늘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장미>)처럼 허를 찌르는 상상력은 여전하지만 현실로 한 발짝 내려와 일그러진 세상에 대한 서사가 늘어난 점이 눈에 띈다.

삶에 힘을 보탤 유머와 익살
<헛디디며 헛짚으며>, 정양 지음, 모악

헛디디며 헛짚으며 정양 시집

정양 시인이 통산 7번째로 펴낸 시집 <헛디디며 헛짚으며>는 웃음과 성찰을 동시에 준다. 특히 학창시절을 회고하며 풀어내는 이런 시는 “아내가 이번 시집을 읽고 나서 웃느라고 눈물이 다 나왔다고” 처음 고백했을 정도로 익살스럽다.
“중간고사 끝난 다음 주 노총각 영어선생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용출이를 불러내더니/ 답안지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꾹꾹 찍으면서/ 시험이 장난이냐 이 쌍녀르 새끼야/ (…)/ 해브 투로 짧은 글 짓는 문제에/ 우이 해브 투 핸드플레이라고 썼더니 저런다고/ 눈물을 훔치며 용출이는 더 크게 울었다”()
정양 시인을 사석에서 무람없이 접했던 이들이라면 그의 유머 감각을 익히 알고 있었을 터이지만 이번처럼 시에서 직접 그 감각을 살린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물론 이번 시집에는 익살만 있는 게 아니다. 그에게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는 “눈을 부릅떠야 할 일이 많은 세상인데 눈을 감고 지나온 적이 없는지 반성과 다짐을 하면서 헛디디고 헛짚을지라도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오기”가 담긴 ‘눈 감은 채’라고 했다.
위에 인용한 시들만으로 두 시인의 신작 시집에 담긴 훌륭한 작품을 다 짐작하기는 어렵다. 꽃피는 계절, 모처럼 시심으로 두근거릴 독서 체험은 어떨까.문화+서울

글 조용호
소설가. 세계일보 문학전문기자. 소설집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왈릴리 고양이나무> <떠다니네>, 장편소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무영문학상, 통영문학상 수상.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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