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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박지완 감독의 <내가 죽던 날>내가 살게 된, 그날

‘그날’ ‘그 시간’에 묻혀, 숨은 쉬지만 결국 죽어버린 날이 있다. 툭 끊어진 희망 앞에 어쩌면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아 무기력해진 내게 사람들은 자꾸 힘을 내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좀 더 희망을 가지라고, 노력하면 된다고, 툭툭 털고 일어나라고, 자꾸 그러면 너만 손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책임은 무거운 추처럼 어깨를 더 짓누른다.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다. 사실, 나는 그날, 그 시간 절박할 정도로 지독하게 살고 싶었다.
※영화의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죽었던 그날

태풍이 몰아치던 밤, 외딴섬에서 소녀 세진(노정의)이 실종됐다. 죽음을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유서 한 장이다. 마비 증상으로 출동 중 사고를 낸 후 복직을 앞둔 형사 현수(김혜수)는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이기도 한 세진의 실종을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섬으로 파견된다. 소녀의 보호를 담당하던 형사 형준(이상엽), 연락이 두절된 세진의 가족, 그리고 세진을 마지막으로 목격했다는 섬마을 주민 순천댁(이정은)을 만나지만 세진의 실종은 계속 미심쩍다. 그렇게 세진의 죽음을 파헤치던 현수는 외딴섬에서 소녀 혼자 감당해야 했을 두려움과 외로움을 공감하듯이 마주하게 된다.
박지완 감독의 <내가 죽던 날>에는 살았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세 여인이 등장한다. 진짜로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현수는 그렇게 죽어가는 세진의 표정에서 어쩌면 지독하게 살고 싶다는 애원을 읽는다. 그리고 그들보다 훨씬 앞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온 순천댁이 있다. 스스로 목소리를 잃게 만들 만큼 큰 통증 속에서 식물인간으로 연명하는 조카 하나 건사하면서 살아가는 순천댁은 마을 사람들과도 거의 소통하지 않고 묵묵히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미스터리 형사물의 외형을 하고 자살이라는 미스터리의 퍼즐을 맞춰가야 하지만 <내가 죽던 날>은 아주 느린 속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따르고 어루만지며 공감하는 영화다. 공감의 온도와 동감의 감각을 함께 아우르기 위해 박지완 감독은 이혼을 앞둔 여성(현수)과 아버지의 범죄 때문에 섬에 갇힌 소녀(세진)의 각각 다른 삶 속에서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표정을 관객들이 발견하게 만든다.

다시 살게 된 그날

박지완 감독은 세 여인을 둘러싼 대부분의 사람에게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비겁해지는 우리 모습을 덧씌운다. 결국 현수가 만나는 세진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저 살 궁리만 하는 사람들이다. 세진의 죽음을 애통해하기 앞서 모두 자기는 잘못이 없다며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순천댁은 다르다. 뭔가를 숨기고 있지만 유일하게 그녀만이 세진에 대해 온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이미 오래전에 삶 속에서 죽기로 결정했던 순천댁은 자신처럼 세진이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다. 순천댁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진에게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아주 어린 삶을 구원하기 위해 두렵지만 용기를 낸다. 그 작은 토닥임은 결국 세진에게 삶을 되돌려 준다. 더불어 그 선의는 현수에게도 새 생명을 전한 셈이다.
박지완 감독은 여고생의 성장을 그린 단편 <여고생이다>로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첫 장편 데뷔작인 <내가 죽던 날> 속에 미스터리와 성장 드라마를 여유롭게 녹여낸다. 각각 다르지만 어쩌면 하나로 엮인 세 여인의 교류와 교감, 그리고 정서는 배우들의 연기로 단단해진다. 영화의 중심에 단단하게 박힌 김혜수와 눈빛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이정은, 그리고 대선배들 사이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노정의의 연기가 그물처럼 얽혔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연출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몇 가지 아쉬움은 김혜수와 이정은이 말하지 않고 서로 마주한 순간 채워진다.
삶은 건조해서 자꾸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어진다. 뾰족하게 선인장이 된 사람들은 두 팔 벌려 서로를 안아줄 수가 없다. 그렇게 바스락대는 무관심에 맘이 쓸려 생채기가 난 그곳에 눈을 돌려보면 늘 사람이 있다. <내가 죽던 날>은 마음의 흉터가 표정이 돼버린 지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영화다. 하늘보다 땅에 가까운 발을 따라가 주는 그런 마음 덕분에 오늘도 숨 좀 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죽던 날>(2020)
감독 박지완
출연 김혜수(현수 역), 이정은(순천댁 역), 노정의(세진 역), 김선영(민정 역), 이상엽(형준 역)
글 최재훈_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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