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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탄생 100주년 아스토르 피아졸라피아졸라 이후, 탱고는 클래식이다

올해 3월 11일 아스토르 피아졸라가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리베르탱고’ ‘아디오스 노니노’ ‘아베 마리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등 그의 대표작을 들을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그는 탱고·클래식·재즈 등 다양한 영역의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탱고의 지평을 확장함은 물론 그만의 독창적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앨범 2014년 12월 20일 발매

피아졸라의 음악을 하기까지

피아졸라는 1921년 3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네 살 때 가족은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피아졸라의 아버지는 건달들이 드나들던 이발소를, 어머니는 그 건달들의 애인이 오는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뉴욕 뒷골목은 꿈을 이루지 못한 비루한 현실의 무대였다. 피아졸라 음악의 슬픔과 쓸쓸함에는 이 시절이 스며 있다.
탱고 마니아인 아버지는 피아졸라에게 반도네온을 사주고 연습시켰다. 아들의 비범한 음악성을 깨닫고 당대 탱고 스타에게 소개하려고 했다. 그중 <포르 우나 카베사(말머리 하나 차이로)>의 작곡가이자 가수·배우인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났다. 피아졸라 부자와 가르델은 동향 사람이라는 공감대로 가까워졌다. 가르델이 피아졸라 부자와 자주 식사했고, 피아졸라의 집은 미국에 거주하는 라틴계 연주자들의 아지트가 됐다. 가르델은 마침 제작 중이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에 피아졸라를 신문 배달 소년으로 출연시켰다.
가르델은 1935년 전미 투어에도 피아졸라를 데려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열네 살밖에 안 된 아들을 멀리 보낼 수 없었던 부모의 반대로 가르델은 피아졸라 대신 호세 코르파스 모레노를 데리고 떠났다. 이들이 탄 비행기는 콜롬비아에서 사고로 한 줌의 재가 됐다. 피아졸라는 “함께 갔다면 구름 위에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을 것”이라 말했다.
가르델의 음악에 대한 직관과 재능, 무엇보다 탱고에 대한 원천적인 사랑은 어린 피아졸라의 음악적 감수성을 성숙시키는 자양분이었다. 1936년,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아니발 트로일로가 이끄는 탱고 앙상블에 들어가 반도네온 솔리스트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소개로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의 제자가 된다. 이후 6년 동안 스트라빈스키·라벨·버르토크 등을 공부하며 정통 클래식을 섭렵했다. 1953년 히나스테라의 권유로 출전한 아르헨티나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졸라는 프랑스 정부의 장학금으로 파리에서 유명한 여성 작곡가 나디아 불랑제에게 배울 기회를 얻는다. 그는 ‘탱고 연주자’라는 경력을 콤플렉스로 여겼다. 그러나 스승 불랑제는 ‘모든 좋은 음악은 평등하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선배 작곡가들의 어설픈 모방보다는 차라리 탱고를 자신의 스타일로 개척하라고 충고했다. “누굴 모방하지 말고 너 자신의 음악을 하라.” 중요한 교훈이었다.

음악계에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 반도네온

불랑제 밑에서 18개월간 공부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피아졸라. 그는 다시 아니발 트로일로 밴드의 반도네온 주자로 활동하며 탱고의 다양한 가능성을 시도했다. 그의 진보적 연주는 아르헨티나 내 정통파에게 반감을 샀다. 어느 날 피아졸라는 카바레에서 클래식 화성을 즉흥으로 탱고에 가미했다. 함께 연주하던 동료들이 연주를 멈추고 그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견디지 못한 피아졸라는 결국 자신만을 위한 밴드를 결성한다. ‘누에보 탱고’(Nuevo Tango, 춤을 추기 위한 탱고가 아닌 감상을 위한 탱고)의 시작이다.
그는 유럽을 주 무대로 삼았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의 전자음악과 퓨전 재즈에 영향을 받은 그는 신시사이저 등 새로운 시도로 전자악기를 이용한 실험을 했고, 1975년 9월에는 아르헨티나로 귀국해 전자 8중주단을 결성했다. 신시사이저·전자오르간·일렉트릭기타에 즉흥연주를 허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 8중주단은 기존 팬들로부터 비난받기도 했지만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1977년을 기점으로 멤버 간 갈등 등으로 8중주단은 와해됐다. 새로운 5중주단은 전자음악 대신 어쿠스틱 실내악을 연주했다. 피아졸라는 다시 파리로 이주해, 5중주단과 함께 공격적 활동을 펼쳤다. 1980년대 후반에는 영미권 활동에 주력해 몽트뢰,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여했다. 그는 여러 장르에서 환영받는 명실상부한 월드스타 반열에 올랐다.
피아졸라는 고된 일정을 소화하다, 심장수술을 받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이즈음 결성해 활동한 6중주단의 음악은 우울한 분위기가 강했다. 1990년 8월, 피아졸라는 뇌출혈로 몸 오른쪽이 마비돼 즉시 귀국, 병원으로 이송됐다. 폐렴과 장출혈까지 겹친 끝에 1992년 7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나 첼리스트 요요 마 등이 탱고를 고전음악의 반열로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육감적인 그루브에서 종교적인 영성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악기 반도네온은 클래식 음악계에 신선한 자극이 됐다.

류태형_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K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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