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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책 《지렁이 울음소리》와 《기나긴 하루》박완서의 가장 처음과 끝
2021년 1월 22일은 고(故) 박완서 작가의 10주기였다. 1970년 마흔 살에 데뷔해 2011년 1월 22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40년 남짓한 동안 박완서 작가는 훗날의 독자들이 두고두고 읽어도 모자람 없을 무수히 많은 작품을 남겼다. 최근 10주기를 맞아 각 출판사들은 박완서 작가의 대표작들을 잇달아 개정판으로 재출간했다. 그중 박완서라는 세계의 가장 처음과 끝을 살펴볼 수 있는 두 권을 골라봤다. 초기 대표작 선집인 《지렁이울음소리》와, 작고 직전 마지막 쓴 소설들이 실린 《기나긴 하루》다. 두 책사이 놓인 40여 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작품은 저마다의 생동감으로 빛난다.

박완서라는 문학적 사건의 시작 《지렁이 울음소리》 | 박완서 지음 | 민음사

《지렁이 울음소리》의 전신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시리즈 중 한 권인 《나목·도둑맞은 가난》이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이자 박완서 작가의 데뷔작인 중편소설 <나목>을 비롯해 <지렁이 울음소리>(1973)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974) <도둑맞은 가난>(1975) <이별의 김포공항>(1974) <카메라와 워커>(1975) <부처님 근처>(1973)까지 1970년대 초반에 쓰인 박완서 작가의 초기 대표작 7편이 실린 책이다.
본래 표제작은 오늘날 독자에게도 널리 알려진 <나목>이었지만, 새로 다듬어 출간하는 과정에서 다소 낯선 <지렁이 울음소리>가 표제작이 됐다. 작품의 순서를 재배열하고 책의 제목을 달리 다는 것만으로 이야기는 새롭게 읽힌다. 특히 표제작이 된 <지렁이 울음소리>는 여성지로 데뷔해 대중소설 작가로 인식되던 작가에게 최초로 제대로 된 문학적 평가를 가져다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번 기회를 통해 특히 재조명되면 좋을 소설이다.
“침실에 일요일 아침 시간이 늪처럼 고이고, 음습하고 권태로운 욕망이 수초처럼 흐늘흐늘 흐느적대며 몸에 감긴다. 나는 남편에게 익숙하게 붙잡힌다. 나에게 그의 몬로가 돼 달라는 눈치다. 나는 그의 몬로가 된 채 내가 짜낸 이태우 선생의 비명을, 신음을 생각한다(…) 그건 어떤 소리 빛깔을 하고 있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 같았을까 몰라.”(<지렁이 울음소리> 중)
소설 속 선연한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 일상의 권태와 이에 대한 저항을 지렁이의 울음소리로 표현하는 작가의 통찰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다. 이외에도 여고 동창들의 위선을 간파하고(<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자들의 염치없는 욕망을 꿰뚫어보며(<도둑맞은 가난>) 절에서 가장 속된 기도를 올리는 여자들을 응시한다(<부처님 근처>). 인간의 가장 내밀한 속을 들여다보고, 이를 다시 바깥으로 태연하게 꺼내 보이고, 끝내는 공감하게 만들었던 작가의 재능이 데뷔 초기에도 어김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남긴 마지막 선물 《기나긴 하루》 |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생전 펴낸 마지막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2007) 출간 이후 작고 전까지 박완서 작가는 총 세 편의 단편소설을 더 발표했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2010) <빨갱이 바이러스>(2009)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2008)다. 2012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기나긴 하루》는 작가 타계 1주기를 맞아 이 세 편에다 고 김윤식 문학평론가·신경숙 소설가·김애란 소설가가 각각 추천한 세 작품을 더해 하나로 엮은 책이다. 이 역시 최근 타계 10주기를 맞아 새 옷을 입고 특별판으로 재출간됐다.
단편 <빨갱이 바이러스>는 세 여인의 각기 다른 사연을 통해 6·25가 남긴 상처와 이념 갈등, 가부장제와 가정폭력 등 작가가 40년 세월에 걸쳐 탐구해 온 주제를 응축시킨 소설이다. 이외에도 갱년기를 거쳐 완연한 노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사유가 세 편의 소설에 집약돼 있다. 함께 실린 <카메라와 워커>(1975)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1993) <닮은 방들>(1974) 등 다른 시대에 쓰인 작가의 작품들과 비교해 읽어보는 재미도 있다.
박완서 작가는 숨을 거두기 전날에도 제2회 젊은작가상 후보에 올라온 젊은 후배 작가들의 단편소설 심사를 보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석에서도 후배 작가들에게 줄 의견을 살폈을 만큼, 마지막 순간까지도 문학의 최전선을 지키고자 애쓴 영원한 현역 작가였다.
실제로 박완서 작가는 200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을 때까지 현역작가로 남는다면 행복할 겁니다.” 작가의 소망은 이뤄졌고, 나아가 그는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됐다. 그의 육신이 소임을 다하고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그가 남긴 정신과 문장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한소범_《한국일보》 기자 사진 제공 민음사,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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