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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2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25어린 딸이 내게 공주가 되라 했다
내가 소설가인 건 맞지만, 글 쓰는 데 중독(中毒)된 그러니까 좀 불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쓰면서 한참이나 망설이고 또 지우고 다시 쓰고 그랬다. 삶의 근본을 들여다보는 게 본질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생명체에 해로운 중독자라고 생각하다니!
나의 중독 증상은 이렇다. 혼자 있을 땐 늘 글을 쓰거나 글과 관련된 생각을 하며 지낸다. 하지만 나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게 하면 우울증의 늪에 빠져버린다. 어둡고 음습하고 숨 쉴 수 없게 하는 우울감은 자기 비하를 부추기고 마침내 파괴나 살해 의욕도 느끼게 한다. 다른 한편으론 불안 증상이 다양하게 도져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조울증으로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이 병을 고치려고 노력하다가 겨우 찾아낸 병의 원인이 내 유전자와 현재의 삶에 켜켜이 쌓인 어떤 덩어리였다. 그 덩어리가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몸 밖으로 나오면 ‘분노’가 됐다. 부당하고 억울해서 하루도 평화롭지가 않았다. 평화롭지 않은 나, 늘 분노에 시달리는 나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서 다른 인생에 매달려야 했다. 그게 결국 중독이 됐다.
이런 시절을 살던 나의 40대, 단지가 시원하게 넓은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나의 황폐한 내면과는 달리 환경은 비교적 우아한 편이었다. 모두 66가구. 그중에 교수가 가족 구성원인 집이 대충 20여 가구, 의사와 기업체 사장과 장르가 다른 몇몇 예술가 등이 모여 살았다. 3층 구조의 빌라는 지하층에 가구별로 두 칸의 방을 주었다. 한 칸은 보일러와 잡동사니를 넣을 수 있는 창고 용도. 나머지 한 칸도 창고용이겠지만 나는 ‘나만의 방’으로 꾸며서 썼다. 1층에 살고 있어서 지하 방 천장이 1층 집의 방바닥이었다. 아이들이 플라스틱으로 된 가벼운 공깃돌로 공기놀이를 해도 지하에선 크게 울렸다. 참지 못하고 올라가 아이들을 윽박질렀다. 가족 구성원 중에 계급적으로 가장 아래인 내 아이들. 내가 낳았으므로 내 ‘소유’로 착각하는 가부장적 어머니였다. 그러면서 나는 가부장제에 골병든 여성들의 삶을 고발하듯 글을 써댔다. 늘 분노로 글을 쓰니 내 표정은 어둡고 일그러졌고 험악했을 터. 그래서 내가 품은 분노의 반사로 또 다른 분노를 아이들에게 물려줬을 것이다.
이런 어느 날이었다.
“엄마! 나 공부하지 않아도 돼! 유산 받아서 살면 되거든!”
놀이터에서 놀던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가 다급하게 들어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유산(遺産)이라니! 그런 건 부자들이나 하는 생각이 아닌가! 순간 이질감이 혼란스럽게 밀려들었다. “그건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야”, 혹은 “엄마는 재산이 없어” 라고 말해야겠는데 입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날은 이랬다.
“엄마, 나 공부 못해도 돼! 엄마는 삼류 대학 나와 돈도 잘 벌고 유명하대!”
아이가 말했다.
나는 지하에서 글을 쓰느라 몰골이 늘 피폐했다. 머리는 부스스. 얼굴은 거칠고 옷매무새는 허름함을 넘어 구질구질했다.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사람들 얼굴을 마주 보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고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했다.
“엄마! 내가 생각하니까 엄마가 귀고리도 안 하고 목걸이도 안 하고 반지도 안 끼고 화장도 안 하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가난하게 보는 것 같아. 엄마, 이제부터 반지도 껴. 귀고리도 하고!”
아이가 사뭇 진지하게 하는 이런 말이나 의문이나 갈등은 전부 놀이터에서 묻혀오는 것일 터.
어느 날 아이가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내게 줬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눈에 잘 보이는 귀고리를 하고 보석이 박힌 듯한 옷을 입은 여자.
그림 옆에는 글이 쓰여 있었다.
“우리 엄마아 엄마 사진에 붓혀조 우리 엄마공주님 우리엄마가 최고야.”
아이를 기르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동네의 모든 어른은 이모거나 삼촌, 그리고 모두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동네. 사람을 곁에 두고는 혼자서, 혹은 자기네 식구들끼리는 콩알 한 개 먹지 못하던 이웃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쭈르르 몰려가서 서로 돕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마을. 농경시대의 끝자락에서 성장한 내게 각인된 마을은 이렇다. 이 시절로부터 30년, 그리고 아이가 엄마를 공주로 그려낸 시절로부터 또 30년이 흘렀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얼마나 바르지 않은 이웃이었는지, 무섭게 깨닫는다. 멀리 두고 비판하고 분석하고 도망치고, 그러면서 반성할 줄은 몰랐다. 타인에겐 가혹하고 자신에겐 오만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40대의 나.
아마 열 살이 채 안 됐을 딸아이가 제 딴에 얼마나 엄마가 가여우면 이렇게 공주 그림을 그려서 선물했을까. 그러면서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던 엄마는 사회변혁을 꿈꾸고 부르짖고…그렇게 살았다. 입안에 가득 고이는 ‘용서’라는 말, 입 밖으로 내기가 아직 부끄럽다.
글·사진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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