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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내면으로 침잠하는 종족



<쓰다> 28호 포스터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어렵게 읽히는 걸 기꺼이 감수하는 글이 있다. 시는 당대의 가장 새롭고 낯선 언어와 관계 맺기를 두려워한 적이 없으며, 이는 더욱 정확히 말하려는 시의 이상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시가 어려워진다고, 독자를 배제하는 문학이 돼간다고, 그래서 요즘 시는 시도 아니라는 비난 속에서도, 여전히 시는 독자에게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말, 그래서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말을 건네려 한다.
<쓰다> 28호에 실린 김행숙 시인의 <카프카 씨, 들으세요>는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의 영향 아래 쓰인 작품이다. 카프카는 요제피네라는 가수를 통해 대중에게 예술 행위를 노동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김행숙은 2020년 현재 우리의 공간과 상황 속으로 카프카와 요제피네를 소환한다. 이제 독자는 그들의 목소리를 아파트의 복도나 엘리베이터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장소에서 들어야 한다. 그만큼 그들은 더욱 구체적이며, 훨씬 낯설다.

축하합니다, 카프카 씨. 당신은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을 가지게 되었군요. 그런 창문이 당신의 글쓰기에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부럽습니다. 암만 소형 평수라고 해도 당신처럼 빼빼 마른 독신남이 살기에는, 넓어요. 그리고 버튼만 누르면 응답처럼 지하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지 않습니까. 나는 계단과 씨름하다가 굴러떨어진 적이 있어요.
김행숙 <카프카 씨, 들으세요> 부분

휴학생으로 이사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화자는 오늘 파견된 곳에서 카프카 씨를 만난다. 카프카에 따르면 “쥐의 종족이라면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거치지 않고 바로 어른이” 된다. 이는 급격하게 성장하는 쥐의 생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혹은 학창 시절의 낭만도 즐길 겨를 없이 노동에 뛰어드는 가난한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쥐의 종족’이란,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자기를 감추고 사는 특정한 부류가 아니라, 우리가 어느 거리, 어느 건물에서 매일 마주치는 저 흔한 노동자들이다.
그럼에도 쥐의 종족으로 비유될 만큼 허름한 노동자의 삶은 어째서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버튼만 누르면 응답처럼 지하에서” 올라오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이미지가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신비는 돈으로 모든 일을 간단하게 만들어버리는 데 있다. ‘나’가 “계단과 씨름하다가 굴러떨어”지는 동안, 누군가는 그저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나’의 육체가 겪는 과정을 간단히 생략한다. 자본주의의 자동화란, 육체가 흘리는 땀과 가난한 삶의 냄새를 우리의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나는 금전을 사랑해야 해요. 돈을 만지작거리는 손은 따뜻하고, 우리가 돈을 주고받는 짧은 순간에도 전염병이 지구처럼 돌고 있어요, 요제피네도 멀리 가지 못했어요. 당신은 그녀가 우리를 완전히 떠나버렸다고 했지만, 그렇게 작은 동물이 어디로, 어디로 간단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나는 또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김행숙 <카프카 씨, 들으세요> 부분

김행숙 시의 ‘나’는 카프카 씨의 이사를 돕기 위해 지하에서 응답처럼 불려 올라온다. 그러면서 그는 고백한다. “나는 쥐처럼 내면으로 침잠하는 종족” 이라고, “나는 금전을 사랑해야”한다고 말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낭만과 학창 시절의 기쁨을 포기하고 노동 현장에 투입돼 원치 않는 삶을 산다. 그런 그에게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전개할 만한 여유도, 현실을 타개할 만한 구체적인 방안도 있을 리 없다. 그는 쥐의 종족이다. 이 구차한 삶이라도 지속하기 위해서, 그는 카프카 씨의 가르침보다 혹은 요제피네의 노래보다, 우선 “금전을 사랑해야” 한다.

카프카 씨의 침대 밑으로 쥐 한 마리가 기어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김행숙 <카프카 씨, 들으세요> 부분

하지만 요제피네는 살아 있다. 현실은 자본으로 교환될 수 없는 모든 것의 가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아니, 자본주의는 모든 것이 자본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어쩌면 쥐의 종족이 그러한 삭막한 믿음에 어떤 균열이거나 오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쥐의 종족은 너무 작고 하찮기에, 오히려 너무나도 작은 존재이기에 그들은 작은 어둠에도 숨어 지낼 수 있다. 카프카가 “그녀가 우리를 완전히 떠나버렸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쥐의 종족은 그의 품이 만들어내는 어둠 속에, 그의 침대가 드리우는 좁은 그늘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김행숙 시인은 바로 그러한 어둠 혹은 그늘 속에 우리의 희망, “거의 아름다워지는 믿음”의 자리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요제피네의 목소리는, 화자의 내면 안에서도, 카프카 씨의 체념에 가까운 가르침 안에서도 발견되며, 또한 “페스트”처럼 어디로든 숨어든다. 자본주의의 화려한 불빛 아래서도 쥐의 종족은 결코 멸종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요제피네의 노래가 들려온다면 그들은 “조용히 일어”설지도 모른다.

글 김잔디_웹진 [비유] 편집자
사진 제공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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