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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책 처방사 김이듬 책 처방 인생은 계속된다
2001년 계간 <포에지>로 등단해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표류하는 흑발> 등을 펴낸 김이듬 시인은 일산에서 ‘책방이듬’이라는 독립서점을 운영한다. 그의 서점이 다른 독립서점과 구별되는 특별한 점은 일대일 개인 상담을 통해 각자에게 적합한 ‘책 처방’을 해준다는 것. 몇 권의 책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수는 없지만, 책이 주는 위로에 기대고픈 이들을 위해 그의 책 처방은 오늘도 계속된다.

관련사진

1 ‘책방이듬’에서 발행하는 문학계간지 <페이퍼이듬> 창간호.

2, 3 김이듬 시인이 직접 책 처방을 해주는 ‘책방이듬’.

4 김이듬 시인은 1년째 모 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지면을 통해 책 처방을 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운명처럼

방금 이제니 시인과 통화했다. “이듬 언니는 강의 경력도 길고 시집도 많이 냈는데, 왜 책방을 해요? 이해가 안 돼.” 아직도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난생처음 사업이라는 걸 시작하려고 할 때 거의 모든 지인들이 왜 말렸는지를 깨달아가고 있지만, 이상 시인이 <거울>에서 말한 ‘사업’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나는 중얼거린다.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과연 작은 책방이 동네에서 문학의 실험실, 문화운동의 장이 될 수 있을까? 국가 프로젝트 사업에 지원하여 용역이나 지원금을 받는다면 ‘독립책방’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율성, 자존감을 스스로 훼손하는건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과 질문들에 빠져 있을 즈음이었다. 그러니까 재작년 늦가을 저녁 무렵, 어떤 사람이 지친 표정으로 책방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작고 마른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그는 꽤나 먼 거리에서 걸어왔다고 했다. 그가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평소처럼 손님의 독서 취향을 파악하고 서가에서 몇 권의 책을 꺼냈는데 그가 말했다. “제가 요즘 고민이 너무 많은데요. 상담 후에 제게 필요한 적당한 책을 추천해주시겠어요?” 그는 인근의 킨텍스 아쿠아리움에서 근무하는 청년이었고 현재 생활부터 과거 학창시절과 어릴 적 얘기까지 털어놓았다. 두어 시간 줄곧 나는 듣는 입장이었다. 듣는 게 말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고 그의 고통과 슬픔, 위기의식이 내게 쏟아져 들어오는 걸 느꼈다. 그는 내가 권한 시집 두 권을 샀다. 다소 밝고 평안해진 얼굴로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나는 쌀쌀하고 컴컴한 길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책방으로 들어와 시를 썼다. 그날 이 후, 나는 책 처방을 시작했다. 그와의 대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발명한 어떤 직분 같았다. 그러니까 책 처방사의 계기도 우연히 발생했다. 어릴 적, 내 심신이 책에 홀린 것처럼, 재작년 어느 날 갑자기, 당장 책방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듯한 예감처럼.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나는 생각한다
실연한 사람에게 권할 책으로 뭐가 있을까
그가 푸른 바다거북이 곁에서 읽을 책을 달라고 했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웃고
오늘처럼 돈이 필요한 날에도 나는 참는 동물이기 때문에
대형어류를 키우는 일이 직업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쳐다본다
최근에 그는 사람을 잃었다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상어와 흑가오리에게 먹이를 주다가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내가 헤엄치는 것을 논다고 말하며 손가락질한다

해저터널로 들어온 아이들도 죽음을 앞둔 어른처럼 돈을 안다
유리벽을 두드리며 나를 깨운다

나는 산호 사이를 헤엄쳐 주다가 모래 비탈면에 누워 사색한다
나는 몸통이 가는 편이고 무리 짓지 않는다
사라진 지느러미가 기억하는 움직임에 따라 쉬기도 한다
누가 가까이 와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 곁에서 책을 읽고
오늘처럼 돈이 필요한 날에도 팔지 않는 책이 내게는 있다
궁핍하지만 대담하게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자라고 있다

_김이듬 <아쿠아리움>

“책은 도끼다”

최근에 나는 책 처방을 예약제로 간격을 두고 침착하게 하고 있다. 운동 처방이나 약 처방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일대일로 만났을 때 즉시 처방이 될 법한 책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책을 일주일 내로 보내주기도 한다. 책갈피에 길지 않은 손편지도 끼워 넣어서.
또한 1년째 대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책 처방을 하고 있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문제들을 갖고 있는 이들의 고민 상담을 받는데, 몇 분에게 장문의 서신과 각자 세 권의 책을 권해드리는 형식이다.
몇 권의 책이 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거나 직면한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다. 어쩌면 책은 상처나 환부를 쓰다듬고 위로하며 덮는 게 아니라 적나라하게 까발려 첨예한 통증과 직면하게도 한다. 카프카의 말을 빌리자면 “책은 도끼다”. 우리의 굳어진 사고의 틀과 얼어붙은 감수성뿐만 아니라 병든 자기 내면을 내리치는 영혼의 연장이라는 말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자기 혁명의 일환으로 책 처방을 계속한다.

글·사진 제공 김이듬_시인, ‘책방이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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