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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책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와 <산책주의자의 사생활>전지적 관점의 ‘산책’에 대하여
산책하기에 좋은 계절에 맞춰 ‘걷는’ 주제의 책 두 권을 소개한다. 두 책의 공통점은 저자가 산책주의자라는 것. 산책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 천천히 걷는 일일진대, 두 저자의 산책은 사전적 정의를 뛰어넘는다. 최여정은 공연·문화기획자로 지낸 10년 동안 단련한 글쓰기 습관을 발휘하여 런던 거리에 숨겨진 16세기 문화사를 촘촘히 꿰어내고, 화가 황주리는 그의 원색의 작품처럼 밝고 환하게 전 세계를 여행하며 만난 도시의 이야기를 변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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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문화사로 보는 런던<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 최여정 지음, 바다출판사

부단히 달려온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홀연히 런던으로 떠난 최여정은 펍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오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런던에서의 일상을 책으로 써내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통속적인 에세이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저자는 연극은 물론 희곡, 건축, 당시의 문화 풍속사에서 연애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 조사와 연구를 통해 런던이란 도시의 문화사적 발자취를 재구성한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400년 전의 이야깃거리와 낯선 골목 이름이 복잡하게 얽혀 쉬이 읽히지 않지만, 그만큼 저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씨름했을지 상상하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스트랫퍼드의 셰익스피어 생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청년이 된 셰익스피어가 상경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런던으로 이동한다. 그의 첫 번째 직업이 극장 밖에서 귀족들이 타고 온 말을 지키고 앉아 있는 발레파킹 담당자였을 거라는 새로운 해석 등 숨겨진 이야기들이 흥미를 더한다. 런던 대화재의 배경부터 세계 최초의 화재보험 탄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극장에서 일해온 전문가답게 글로브극장, 로즈극장, 포춘극장, 호프극장을 비롯해 런던 최초의 공공극장인 더 시어터 등 수많은 극장과 극장주, 극장 후원자들의 에피소드를 실감나게 펼쳐낸다.
이 밖에도 셰익스피어가 질투한 경쟁자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소네트 연작의 주인공, 사우샘프턴 백작 등 다양한 인간관계가 그려진다. 입장료 수입보다는 먹을거리 수입이 높았던 여관이 극장의 역할을 대체하기도 했던 시절에 대한 묘사와 함께 ‘하우스라이트’(Houselight, 객석 조명을 낮추는 것), ‘풀하우스’(Full House, 공연장이 꽉 차는 것)와 같은 숙어의 어원까지 폭넓게 소개해 영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높여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춤을 췄다는 마이터 펍부터 단두대 구경의 명소였다는 맥파이 앤 스텀프 펍까지, 런던의 유서 깊은 극장, 여관, 성당, 펍 등의 공간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한다. 훗날 저자가 이끄는 대로 런던판 ‘알쓸신잡’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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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감성으로 만나는 일상<산책주의자의 사생활> 황주리 지음, 파람북

화려한 원색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중견 화가 황주리는 <산책주의자의 사생활>에서 뉴욕, 오슬로, 케냐 코어, 스리랑카, 프라하, 뉴멕시코, 사라예보, 뉴올리언스, 아바나, 잔지바르, 쿠스코, 산토리니, 코가서스, 윈난성 사시 등 다양한 도시에서의 정서적 경험을 그림과 함께 풀어낸다. 책에는 해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숨어 있는 공간도 여럿 등장한다. 그 가운데 섬에 대한 경험을 담은 덕적도 서포리 바닷가와 백아도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섬으로 가려면 배를 타고 가면 된다. 몇날 며칠 안개가 자욱해서 배가 뜨지 않더라도, 그저 배만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나’라는 섬에서 ‘너’라는 섬으로 가려면 우리는 무엇을 타고 가야 할까? 우리 모두는 다 하나의 작은 섬이다. … 지독하게 고독했던젊은 날 우리 모두는 그저 표류하는 섬이었다. … 지금 나는 일부러 고독을 찾아 섬으로 간다. 고독은 참으로 사람을 맑고 투명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_ ‘떠나가는 배에 관한 명상’ 중에서
책 속 곳곳엔 아포리즘이 보물찾기처럼 숨어 있고, 여행 중에 만난 골목과 지붕, 일상 속 지물에 포개진 화가 특유의 그림들이 글 읽는 맛의 풍미를 더한다. 인용된 음악이나 시, 그리고 에피소드의 고유함에서 황주리 작가의 취향을 발견하는 재미도 크다. 작가는 “상처가 없어야 고가의 보석이지만, 상처가 전혀 없는 것이야말로 가짜일 확률이 높다”며 스리랑카의 보석 산지인 라트나푸라에서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절을 떠올린다.
내전의 도시 사라예보에서 1960년대 히피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플라워 칠드런’(Flower Children)처럼 머리에 꽃을 꽂고 반전을 외치며 세상의 길을 걷고 싶다는 저자의 바람처럼, 산책은 나를 만나고 세상을 만나게 하는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창조적인 행위 아닐까? 산책하기 좋은 별 지구에서 산책하기 좋은 이 계절에 두 권의 책을 지도 삼아 혼자라도 걸어볼 일이다.
글 오진이 서울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제공 바다출판사, 파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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