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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안무가 안은미빡빡머리 안무가, 펄떡이는 삶을 몸짓으로 기록하다
안무가 안은미는 한국 무용계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이다. 빡빡 깎은 민머리에 오색찬란한 의상, 주렁주렁 매단 액세서리들은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범상치 않은 외모 때문에 언뜻 ‘센 언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특유의 재담을 풀어놓으면서 ‘우하하’ 웃을 땐 동그란 얼굴이 동자승처럼 변한다. 그가 지나다니는 곳마다 묘한 에너지가 뿌려진다. 그의 춤도 그렇다. 그의 작품에는 극적인 색채와 유머, 상상력과 창의성이 넘실댄다. 그런데 이상하다. 밝디 밝은데 웃다 보면 눈물이 나기도,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기도 한다. 이런 묘한 신명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통하고 있다. 그는 최근 세계 현대무용가들의 성지로 꼽히는 프랑스 파리 ‘테아트르 드 라 빌’의 상주 예술가로 선정되며 무용계를 놀라게 했다. 우아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 대신 안은미컴퍼니 연습실 근처의 시끌벅적한 횟집에서 그를 만났다.

안무가 안은미

틀도, 공식도 없다… 자유인 안은미표 ‘북한춤’

안은미는 무용계의 틀을 깨는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으로 세계무대에서 주목받는다. 그의 작품은 소재와 형식, 내용에서 특정한 공식이 없다. 최근에는 <안은미의 북한춤>(6월 1일~3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이란 작품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분단의 시간이 70년 남짓 흐르는 동안 같은 뿌리에서 시작됐지만 전혀 다른 궤적을 걸은 남과 북의 몸짓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마련한 무대다. 최근 남북 해빙 무드에 맞춰 급히 마련한 ‘반짝 공연’이 아닐까 하겠지만 안은미가 북한춤에 관심을 둔 건 수년 전부터다.
“제가 북한춤을 춘다니까 사람들이 ‘역시 안은미는 진짜 빠르다’고 그래요. 근데 우린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거든요. 제가 남북정상회담이 열릴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공연을 열게 됐죠. 덕분에 당황스러울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다 운명이려니 해요. 하하.”
파격과 도전의 안무가로 불리는 그에게도 북한춤은 미지의 세계였다. 유튜브, 월북 무용가 최승희 무보집 <조선민족무용기본>(1958) 등을 뒤졌고, 북한에서 무용 교육을 받은 재일 무용가 성애순 씨를 초청해 춤사위를 직접 익히기도 했다.
그는 “북한춤은 발이 굉장히 빠르고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척추를 꼿꼿이 세우는 동작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굿거리·휘모리·자진모리장단의 음악을 쓰니까 금방 익숙해지는부분이 있어요.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북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게 바로 춤이죠.”
그의 말대로 이번 작품은 특정한 북한춤을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리를 곧게 펴고 열을 지어 행진하는 북한 군인들을 연상케 하는 춤부터 군중 무용처럼 모두가 따라 할 수 있는 쉽고 반복적인 동작, 알록달록 유쾌하게 재해석한 한복 의상들까지 북한의 정치, 사회, 문화 속에 스며 있는 다양한 습관과 몸짓을 춤 속에 녹였다.
그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남과 북의 몸짓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북한 사람들만이 유지해온 움직임은 무엇인지, 그것이 남한 무용수에게 어떻게 체화되는지, 남과 북의 몸짓이 만나면 어떤 새로운 움직임이 탄생하는지 등을 실험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저씨·할머니·장애인들과 함께 춤을… 춤을 넘어 ‘몸의 인류학’으로

늘 파격적이고 색달라 보이지만 그의 관심은 이렇듯 사람과 사회,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몸짓을 기록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그는 우리 몸과 삶에 쌓인 흔적을 춤으로 승화시킨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면서 만난 할머니들의 즉흥 몸짓을 안무, 촬영, 기록한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2011), 10대 청소년들의 춤을 내세운 <사심 없는 땐쓰>(2012), 평범한 대한민국 남성에 초점을 맞춘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2013) 등 ‘몸 시리즈’ 3부작이 대표적이다. 특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지금까지도 해외무대로부터 러브콜이 이어지는 수작이다. 안은미는 “할머니들의 막춤은 단순한 막춤이 아니라 그들의 100년간의 몸의 역사가 담긴 근대 민속 무용”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나간 거죠. 찍는 과정에서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고 많이 깨달았어요. 펑펑 울면서 촬영했어요. 춤 안에 한 사람의 삶이 다 드러나니까 미칠 것 같더라고요. 그 사람을 스캔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춤에 모든 게 다 녹아 있으니까.”
소수자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조명하는 시리즈도 이어지고 있다.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작업한 <안심(安心)땐쓰>(2016), 저신장 장애 무용수들과 함께 작업한 <대심(大心)땐쓰>(2017)를 공연했고 성(性) 소수자와 함께하는 <방심(放心)땐쓰>도 내년께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2020년에는 2000년에 태어난 ‘밀레니엄 베이비’들이 20년간 몸에 쌓아온 특성을 들여다볼 예정이다. 작년 9월에는 군대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들을 무대에 세웠다. 군에서 사망하거나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무대 위에서 한없이 북을 두드리고 아들을 그리는 춤을 췄다. 이들의 한 맺힌 움직임은 객석을 내내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결국 그의 작업은 춤을 넘어 ‘몸의 인류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네 농축된 삶이 한바탕 터져 나오기에 그의 작품에는 신명도, 익살도, 눈물도 있다는 평을 듣는다

관련사진

1 <대심(大心)땐쓰>.(사진 최영모)

2 <안심(安心)땐쓰>.(사진 최영모)

3 <안은미의 북한춤>.(사진 제공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뉴욕 누빈 빡빡머리 동양인 무용가

안은미의 트레이드마크는 역시 빡빡머리와 현란한 색상의 패션이다. 그는 언제부터 민머리로 지냈을까.
“1991년부터 머리를 밀고 다녔으니까 오래됐죠. 그보다 훨씬 전부터 밀고 싶었는데 조금씩 짧게 자를 뿐 용기를 못 냈어요. 한국에서 머리를 민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어머니 역시 ‘여자는 예뻐야 한다’는 옛날 생각을 가진 분이셨고요. 머리를 미는 것은 그러한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하나의 퍼포먼스였어요. 근데 밀고 나니 또 너무 어울리지 않겠어요.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하하.”
그의 패션도 마찬가지. 그의 의상은 무지갯빛 원색부터 형광색까지, 땡땡이부터 꽃자수까지 대담하고 독특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예뻐서 입는다”고 설명한다. ‘괴짜 무용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이화여대와 동 대학원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유학했다. 소위 정통 코스를 밟은 셈인데 그는 그 안에서도 튀는 학생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제 첫 개인 발표회는 ‘적어도 안무는 이래야 한다’는 당시 무용계 관습에 대한 반항이었어요. 그 고민을 대학 시절 4년 내내 했습니다. ‘안무란 무엇이다’란 무용계 관습들에 전혀 동의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인문학 강의를 더 많이 들었습니다. 여성학, 심리학, 미술사 같은 과목들을 찾아 들었죠. 당시 무용계는 서구에서 들어온 테크닉을 따라 하는 데 급급했어요. 전 의문투성이였어요. 그럼 그 테크닉이 안 되면 춤을 못 추나, 서양에서 들어온 테크닉이 우리 몸에 맞나, 나처럼 팔다리가 짧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죠. (웃음)”
그는 어떤 움직임과 몸에 ‘정답’을 설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팔다리의 길이에 아름다움의 기준을 두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죠. 팔다리의 길이가 아닌 운동성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길면 긴 대로 서글프고 짧으면 짧은 대로 예쁠 수 있게요. 무엇이 예쁘고 좋은 것인지를 평가할 권한이 과연 누구에게 있느냐는 거죠. 전 제 짧은 팔과 다리로 내 나름의 운동성과 행복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야 남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춤이 정말 재밌고 즐거운 거라고.”
그래서 그는 1992년, 30살에 뉴욕으로 떠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는 “남들의 기준을 따르지 않으면 ‘루저’가 될 것 같은 두려움, 그걸 따라야 한다는 욕망이 자랄 것 같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뉴욕으로 도망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전 삶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두려움, 욕망이 참 싫었는데 한 번에 버리기도 어렵더라고요. 그럼 내가 이 집을 떠나봐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출하듯 뉴욕에 갔던 것 같아요. 영어도 못하고, 돈도 없는데, ‘촌년’이 일단 뉴욕으로 갔어요. 이미 석사를 했지만 다시 뉴욕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어요. 초반엔 일부러 한국 사람도 안 만나고 정말 한가하게 지냈어요. 그 고요함이 오히려 절 객관화하는 데 도움을 주더라고요.”
뉴욕에서 그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뉴욕에서도 그는 튀었다.
“동양에서 왔다고 하면 인도의 명상, 일본의 부토(일본 전통극 노와 가부키를 서양의 현대무용과 접목해 만든 춤) 같은 춤을 떠올리더라고요. 근데 우리가 평상시 그렇게 명상하고 고요하게 살던가요. 난 그냥 내 방식대로 춤을 춰야겠다 생각했어요. 그게 외국 친구들이 보기에 그렇게 웃겼나 봐요. 머리는 빡빡 밀고 나이도 많은데 너무 철딱서니 없고 너무 명랑하고. 학교는 제 목소리 때문에 떠나갈 것 같고. 부잣집 딸도 아닌데 어찌나 당당한지. (웃음) 친구들이 제 작품을 정말 좋아했어요. ‘동서양의 이 신선한 조합은 뭐지’ 싶었나 봐요. 동양적인 것 같은데 아방가르드하고, 미니멀한 것 같지는 않은데 동작은 많지 않고, 근데 그 안에서 번개도 치고 불이 붙고요. 무용수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의상을 입혀주니까 좋아 죽고. 제가 수공예로 한 땀 한 땀 옷을 만들어 입혔거든요. 하하.”
그는 1998년과 2002년에 두 차례 뉴욕문화재단 안무가상을, 1999년에는 맨해튼예술재단 안무가상을 받았다. 그즈음부터 한국에서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무용계의 모난 돌이자 이단아였던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2000년 대구시립무용단장으로 한국에 복귀했다.
“인생이 웃겨요. 나이도 어리고 타 지역 출신에 머리는 빡빡 민 제가 전형적인 공무원 사회에 진입한다는 게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저도 처음엔 두려웠죠. 딱 1년만 해보자고 시작했는데 작업이 너무 즐거워서 총 3년 7개월을 있었어요. 무용단의 서열을 없애고 무대와 의상에 돈을 아끼지 않았어요. 결과야 뭐 꽉꽉 들어찬 관객이었죠.”

돈 없으면 금니 팔고, 공연장 없으면 마당에서

“우주가 은미(그는 자신을 자주 이렇게 부른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를 보면 한편으로는 황당하기도,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그의 극단적 낙관주의는 주변 사람들을 웃게 하고 기분 좋게 한다. 그는 “가진 게 없다 보니 상상력이 ‘만땅’으로 채워졌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렇게 여유로워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웃고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까 싶어서 아닐까요. 풍족하지 않으면 머리를 수십 번 굴리게 돼요. 예전엔 돈이 없으니 제가 수공예로 옷을 만들어 무용수들에게 입혔는데, 그게 ‘오트쿠튀르’(소수의 고객을 대상으로 제작된 고급 맞춤복) 아니겠어요. 대학 시절 무대 세트를 만들기 위해 신촌 일대 중국집을 다 돌아서 나무젓가락을 협찬받은 적도 있죠. 한 곳당 나무젓가락 10개씩을 받아서 설치예술 비슷한 걸 했어요.”
현재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는 유효하다. “쫄 것 없어요. 돈이 부족하면 금니 팔면 되고, 공연장을 못 빌리면 마당에서 하면 돼요.” 그는 결혼한 적은 없지만 사랑은 ‘융단폭격처럼’ 했다고 한다. “바라는 거 없이 그냥 무조건 사랑했어요. 내가 사랑하면 됐지, 왜 그 사람의 마음까지 강요하나요. 뭐가 되고 싶다, 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면 세상은 전부 다 내 것이에요. 우주는 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의 춤 역시 수강료를 내야 하는 무용학원이 아닌, 끝없는 상상의 세계에서 먼저 시작됐다. 그는 5살 때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한국무용 전공생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이가 현실에서 본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이었다. 마치 달나라로 갈 수 있는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무작정 그 언니들을 쫓아서 들어간 무용학원. 돈을 내야 이 학원에 다닐 수 있다는데 집안의 경제적 여력이 충분치 못했다. 그러나 5살 꼬맹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돈이 없다고 하니 일단 나 혼자 추고 있어야지. 저기 갈 때까지 혼자 잘 놀고 있어야지.’ 그렇게 그는 모노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쓰듯 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상한 비현실에서 둥둥 떠다니는 아이”로 기억했다. 7년을 기다린 끝에 무용학원 수강료 4,000원을 받게 된 그는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시범을 보여줘도 잘 안 봤어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만 보고 또 봤죠. 너무 좋아서. 연습하는 그 모습 자체가 아름다워서. 7년을 기다려온 움직임인데 왜 안 그랬겠어요.” 그는 “가난은 불편함을 줬을 뿐 나를 좌절시키지는 못했다”며 “그것을 어떻게 딛고 일어날 것인지가 내 화두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뭔가 채워지지 않으면 거기에서 또 다른 아이디어가 나오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파격보다 자유… ‘안은미식 축제’에 초대합니다

그는 오늘도 뻔한 춤, 죽어 있는 춤을 거부한다. 그는 “일부러 독특함을 만들고자 한 적은 없다”고 말하지만 춤추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삶의 태도는 명확히 갖고 있다. 그가 말한 원칙 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대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돈이 없을수록 돈을 세게 써야 한다”, “작품을 만들 때 의상은 언제나 새 옷이어야 한다. 춤은 잔치와 똑같아서 식은 음식이 나오면 안 된다”, “사람을 사랑할 때는 뼈까지 고는 마음으로, 춤을 출 때는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각오로….” 이런 원칙은 결국 한 가지 목표로 통한다. 자신을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안은미식 축제’를 선사하고 싶다는 것. 그가 생각하는 춤은 신을 만나게 하는 매개다. 온 우주를 여행할 수 있게 하는 판타지 구름이다.
“춤의 원형을 떠올려보세요. 원시 시대 때 사냥 가기 전에 힘을 내기 위해 춤을 췄어요. 추울 때, 무서울 때, 제사를 주관하며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른 존재가 될 때 춤을 췄습니다. 제 공연을 보는 관객도 여기에서 저기까지 보내주고 싶어요. 저는 정말 원시적인 아이디어로 무대를 짜요. ‘불을 밝혀, 피부가 껍질까지 보일 거야’, ‘일단 뛰어, 피가 돌 거야’ 하는 식입니다. 어떤 이론이나 공식을 만드는 순간부터 춤이 재미없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는 그렇다고 자신의 작품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냥 내 것을 할 뿐”이라고 한다. ‘이 작품이 성공할까? 표가 잘 팔릴까?’ 이런 생각도 안 했다. 그는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고 발표한다. 자신을 ‘다산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실제 그가 보유한 레퍼토리만 150개가 훌쩍 넘는다.
“제 작품이 완벽하다거나 명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전 그냥 제가 궁금한 걸 무대에 올릴 뿐이에요. 헛소리를 많이 하다 보면 말이 되는 것들도 나오잖아요.” ‘정답 없음’이란 기준은 자신뿐 아니라 작품을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공연 보다가 잤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 그럼 ‘잘 잤네요’라고 해요. 공연을 꼭 봐야 합니까.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보죠. 재우는 것도 내 재주입니다. (웃음) 공연을 보고 본인이 제대로 본 게 맞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죠. 전 그럼 ‘알아서들 보세요’라고 해요. 노예들도 아닌데. 그냥 춤이란 판타지 구름을 타고 둥둥 날아오르면 돼요.”
마지막까지 이보다 더 유쾌할 순 없다.

안무가 안은미

글 임수정 연합뉴스 기자
사진 백종헌
사진 제공 안은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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