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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1960년대 벽보 앞 풍경 한자리에 모여 정보를 공유하던 시절
1950∼60년대엔 ‘벽보’가 주요 소통 수단이었습니다. 당시 중요한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신문·통신사에서 호외(號外)를 발행하거나 벽보를 붙여 뉴스를 전했습니다. 벽보가 붙은 신문·통신사 사옥 앞에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기 위해 사람들이 몇 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각종 SNS로 엄청난 양의 정보가 유통되는 요즘은 벽보가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요즘도 시내 곳곳에 벽보가 붙어 있지만 대부분 광고지들입니다. 모바일로 실시간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건 편리하지만 사람들과 웅성대며 세태를 공유하던 시대의 여유가 그립기도 합니다.

메모리 인 서울 관련 이미지 <사진 1> 1963년 3월 16일 동화통신 앞 풍경.

동화통신 앞에 붙은 벽보

<사진 1>은 1963년 3월 16일 동화통신 앞 풍경입니다. 이날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성명을 통해 민정 불참 약속을 뒤집고, 군정을 4년간 연장하는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또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 조치법을 공포해 정당 활동을 정지시켰습니다. 군인들이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연장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인 다음날 이루어진 일입니다. 손글씨로 쓴 3·16성명 특보를 보고 있는 시민들의 표정이 어둡습니다. 각계각층의 3·16성명 철회 요구가 거세지자 박정희 의장은 4월 8일 국민투표를 보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동화통신은 1956년 미국 AP통신과 수신계약을 맺고 정식으로 창설됐습니다. 동화통신은 1962년 언론기관 통폐합 조치의 일환으로 합동통신과 통합하도록 정부의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1973년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 휴간한 뒤 그 해에 폐간해 창간 18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예전에도 광고 벽보는 골칫거리였나 봅니다. 1950년 한 신문 가십란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뜯어도 뜯어도 또 붙이는 벽보. 무엇이 그리도 광고할 게 많은지 서울 장안 담장이란 벽이란 전주란 안 붙어 있는 곳이 없다. 번연히 일정한 게시판이 있는데도 함부로 붙이고는 사라진다. 노발대발한 건물 관리자는 혀를 차며 뚝 떼어버린다. 이 얼마나 시간적 물질적 손해냐. 건설적 내용은 그래도 괜찮지만 사주쟁이 광고, 더부살이 광고 등은 문명국의 수치요 도시 미관상 아름답지 못한 풍경이다. 여기에 새로운 직업을 가진 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이러한 벽보를 전문으로 떼러 다니는 휴지장사다. 하루 수입이 600원은 된다니 과연 휴지 값도 무시 못할 존재다.”

메모리 인 서울 관련 이미지 <사진 2> 선거운동원들이 선거 벽보를 정리하는 모습.

벽보와 정치

선거 벽보와 후보 소개 인쇄물 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선거에 출마한 후보에 대한 정보를 다양한 경로로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벽보 앞에 사람이 몰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쇄물도 집안 구석에 쌓여 있다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사진 2>는 1960년 한 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이 개인 연설회 안내지와 선거 벽보 등을 정리하는 모습입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일하는 운동원의 모습이 낯설어 보입니다. 그 해 7월 29일 제5대 민의원·참의원 총선거가 열렸습니다. 이날 선거는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로의 제3차 개헌에 따라 ‘국회의원 선거법’이 새롭게 개정된 후 6월 23일 공포돼 이전 민의원이 해산된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선거로 1952년 제1차 개헌을 통해 입법화됐지만 6·25전쟁과 자유당의 장기집권 등으로 인해 한 번도 구성되지 못했던 양원제 국회가 탄생했습니다. 이날 투표율은 84.3%였으며 선거 결과 민의원 233명, 참의원 58명이 뽑혔습니다. 이 선거를 통해 집권한 민주당은 국회에서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후 총리로 지명된 장면을 인준해 8월 23일 새 내각을 출범시켰습니다.
당시 선거가 끝난 후 벽보 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소개한 신문기사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실시간 개표 방송을 하지 않던 때라 선거 결과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신문·통신사 벽보로 몰려들었나 봅니다. “하루밤의 궁금이 지나고 서울 시내는 개표 결과를 알리는 라디오 소리와 함께 벽보가 붙여지고, 신문사의 호외가 거리에 날리었다. 이곳저곳에 웅성대는 군중은 호외를 들고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벽보 앞에 둘러서 있는 군중은 까맣게 쓰인 투표점수를 들여다보며 내가 투표한 사람에 대한 희망적 관측이나 하는 듯이 무거운 표정을 짓는가 하면 반가운 듯이 날뛰는 친구도 있다.”

사진 김천길_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글 김구철_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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