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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대담

10월호

미당문학상과 <미당 서정주 전집> 발간 관련 논쟁기념해야 할 존재인가, 기억해야 할 존재인가?

미당의 문학과 행적에 관한 논란은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미당에 관한 논쟁이 수면 위로 오르게 된 일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한국작가회의에서 관련 토론회도 있었으나, 직접적인 영향을 준 계기는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던 김혜순 시인이 5.18문학상 본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벌어진 논란이었다. 시인 스스로 정중히 사양한다고 함으로써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2017년 미당문학상 후보들이 거론될 무렵 다시 논란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특히 미당문학상 후보를 거절한 송경동 시인의 글이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면서 미당문학상과 관련된 논란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나아가 최근 20권에 달하는 <미당 서정주 전집>이 완간되면서 그 열기가 한층 달아오르고 있다. 그동안 미당과 관련한 논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려왔다. 앞으로 이어질 논쟁이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번 대담이 그 디딤돌을 마련할 수 있었으면 한다. (김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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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
김태선 문학평론가
토론 |
이명원(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이영광(시인, 고려대 교수)
최현식(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황규관(시인, 출판사 삶창 대표)
일시 |
2017년 9월 4일 오후 4시
장소 |
연희문학창작촌 문학미디어랩

김태선 오늘날 미당에 관한 논쟁은 세 가지 문제로 집약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미당의 역사적 행위와 그의 문학을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다른 하나는 미당문학상 제도에 관한 논란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는 논쟁이 유통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2000년 미당 사후부터 끊이지 않고 논의되어왔으나 해결점을 찾지 못한 문제입니다. 미당의 문학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역사적 과오와 흠결은 있으나 문학은 그 자체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요.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측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정치적 문제는 그의 작품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바꿔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와 ‘시인’을 분리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이영광 미당 시의 목소리 주인인 시적 주체는 그렇게 투명한 존재가 아닙니다. 시인이 창작을 하는 과정에는 시와 시인의 상상적 불일치를 허용하는 복잡다단한 계기들이 작용합니다. 미당 시의 뛰어난 성취는 우리 시의 상상력을 경험적, 의식적 한계 너머 무의식의 차원으로 밀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에 없던 낯선 목소리의 출현을 초기 시에서 접하게 되는데요. 그런 작업을 수행할 때 미당 개인과 그의 시적 주체 사이의 괴리와 간극을 보게 됩니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미친 시인’의 상태와 비슷한 것인데, 그 층위에서 생각하면 결코 시와 시인은 분리되지 않고, 바로 그런 층위에서 작업했기 때문에 미당은 새로운 시를 쓸 수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동시에 무의식적 무대에서 활동하다 보니 그것이 하나의 체질이 되어서, 현실에서는 규범적 의식이 약화되었고, 쉽게 보아 넘기기 어려운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이명원 미당의 문학은 작가론적 견지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저는 미당문학상이 처음 만들어진다고 할 때 비판적 견지의 글을 썼습니다. 미당의 시에는 초기부터 후기까지 하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하늘은 결국 죽음의 미학과 통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미당은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 伍長 頌歌)에서뿐만 아니라 산문, 소설 등을 통해 파란 하늘 속에서 소멸한다는 것이 가지는 마술적인 신비를 제창하고 있거든요. 미당은 하늘의 성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시인이 특정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변주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무의식의 형태로 나온다고 할지라도 의식화되어야 하는데 미당은 그 의식화를 회피함으로써 시를 애매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문학상과 같은 제도는 미당 문학을 한국 문학사 안에서 매우 중대한 것으로 기입하는 행위입니다. 미당의 족적을 보면 저는 미당이 단순한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당은 자신은 시인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정치 지향성이 강하고 당파성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제말기 대일협력뿐만 아니라 한국 시에 대한 여러 형태의 오인을 초래하게 한 당사자가 미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당이 문교부 편수과장이 되고 나서 만들어진 국어 교과서는 청록파, 생명파, 순서정파들만 주류로 기입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교과서를 통해 최초로 시를 접하는데 이것이 시에 대한 오도된 경향을 초래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미당은 국면마다 당대정권과 전혀 불화하지 않았어요. 이승만에 대한 전기를 자청해서 썼고, 5.16군사정변 이후 1962년에는 五月文藝賞을 받아요. 박정희 정권하에서 문예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고 전두환 정권에 가면 노골적으로 송축 시를 쓰기도 하지요. 미당에게는 하늘이 비어 있는 중심이에요. 하늘이라는 이미지에 일본의 천황,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얼마든지 기입될 수 있습니다. 미당은 무의식적인 욕망의 주체라기보다는, 의식적으로 자기 문학과 정치적 행적을 결합시킨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그의 문학을 현실 속에서 거대 언론사가 제도화해서 문학사적으로 기리는 것은 한국 문인들의 문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구조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황규관 제 경험으로는 ‘시와 시인을 분리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명제 자체가 틀렸다고 봐요. 시인의 삶을 비판할 때 시인의 인격과 도덕 감정을 비판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시 자체는 시인의 삶의 한 층위일 뿐이에요. 그 자체가 시인의 삶 중 일부라는 거죠. 미당이 무의식적인 세계의 시를 광기 어리게 썼다고 하는데 그것 또한 신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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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식 미당은 생각보다 치밀하고 계획적인 시인이었다고 생각해요. <질마재 신화>를 거쳐서 <서으로 가는 달처럼>, <80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가면 거꾸로 그 죽음 속에서 영원한 삶을 보고자 했습니다. 미당은 하나의 커다란 이념, 정치적 성향보다는 자신이 꾸준히 밀고 나가는 지점이 있었다는 것, 그런 부분에서 현대사와 마주쳐야 했던 부분, 자기가 했어야 했던 역할도 있을 겁니다. 친일 시를 쓴 것을 ‘종천순일’이라고 한 것도 이와 관련되지 않을까 합니다. 혹은 일제의 힘과 전세를 판단했을 때 이쪽이 더 오래갈 것 같았고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얘기했죠. 현실과 타협적이고 낭만적인 모습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한 개인이 시대를 감당해야 하는 몫은 다른 차원들과 비교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념이 한 개인을 옥죄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이 시와 시인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는지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황규관 원론적으로 미당이 독립투사가 되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한 개인마저도 역사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내면이 형성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면 일제강점기라든가 권력이 바뀔 때마다 보여줬던 모습은 회피 아니면 순응으로밖에 볼 수 없어요. 심지어 미당이 시대를 고민하는 방식은 일단 없어요. 반공주의도 말할 수 없이 비천해요. 미당이 사회주의자이거나 민족주의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에요.

이영광 미당 시를 옹호하는 분들도 미당의 삶과 인격에 미흡한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미당은 옛날 사람이고 현대성의 첨예한 국면을 이해한 시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시대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동시에 체제 순응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그 배후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미당은 무속적 정신 현상에 친숙한 사람이었고, 무속의 전통과 문화에 정신의 뿌리를 둔 사람이었습니다. 무속은 인간 삶의 문제들이 바깥의 힘에 의해 비롯된다고 보고, 어쩔 수 없는 바깥의 힘에 대해서는 ‘적응’이라는 태도를 취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의 정신분열은 무의식의 힘을 불러와 뛰어난 시를 낳은 요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현실 권력에 굴종하는 삶을 낳기도 했습니다. 못난 행적과 시의 남다른 성취는 한 뿌리의 두 가지 아닐까 해요.

황규관 뛰어난 시라는 관점부터 다시 정리해봐야 하는데요. 연구자적인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고 좋은 발견이라고 봅니다. 무속적인 세계를 에토스(ethos)로 갖든 그 자체가 무의식이 되었든 간에 뛰어난 시를 써주었다고 하는데, 미당 시에 현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나요?

최현식 미당만큼 자기 시 세계를 한 군데 고정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며 말의 형식을 바꿔 나갔던 시인이 우리 시사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습니다. <화사집>과 <신라초>와 <질마재 신화>를 비교하면 명확하게 그 목소리들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현실을 얘기하지만 현실을 얘기하지 않는 이상한 상태, 신비주의에 빠지는 측면도 있는데 그렇다 치더라도 미당만큼 자기 시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 시인은 많지 않다는 점, 실험성의 측면, 시 세계를 넓혀 나간 부분은 여전히 현재적인 부분에서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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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작가론적 견지에서 미당의 시어들은 매우 이완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한 시인이 다음 시집으로 넘어가는 변주, 연속과 단절 차원에서 보는 것은 문학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토대지만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되고 맥락화되어야 합니다. 시 자체만 보면 미당은 무욕의 시인 같기도 하고, 마성적인 욕망으로 들끓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 이미지로 고정되는데요. 그걸 확대해 작가의 삶과 문학 전체를 보자는 거죠.

황규관 미당 시에 실험성이 있다는 것은 뜻밖의 해석 같습니다. 연구자 입장에서는 형태소, 표현이나 비유의 변화, 소재의 다른 면을 실험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창작자가 보기에는 굉장히 나이브합니다. 미당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락과 토속성이 선천적으로든, 유년 시 겪었던 고향의 에토스로든 간에 결합되어서 어느 시점부터 굉장히 나이브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영광 미당의 일차적인 기여는 한국 시의 활동 무대를 무의식으로 넓혀 나갔다는 겁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했던 쪽으로 넓히거나 깊이를 더해가는 시도가 있었다고 보는데요. 하늘의 모호성, 지나친 관념성, 신비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겠지만 다른 속성의 것들도 하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명원 미당이 쓴 산문들을 보면 결국 하늘은 죽음이에요. 미당은 죽음을 충동하는 시인이라는 거죠. 특히 그의 친일산문 <스무살 된 벗에게>를 보면 하늘 이미지가 적극적으로 강조되고 있어요. 문제는 오늘날에도 미당 전집의 편집자들이 숨기고 싶은 부분은 삭제한다는 거죠. 이 산문이 왜 중요하냐면 초기 미당의 시적 출발점이 거기 있어요. 하늘의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 욕망의 이미지들이 그 이후에 변주된단 말이에요. 그 기원을 삭제해버리면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교과서 해설자 수준에서 미당에 대한 정보를 취합할 수밖에 없거든요.

최현식 하늘과 바다는 서정주의 시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납니다. 친일 시에서의 하늘의 이미지가 천황을 내면화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정주 시에서 하나의 변형과정입니다. 하나의 모티프가 무엇하고만 연결되어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죠. 더군다나 하늘이나 죽음과 같은 아주 보편적인 것은요.

황규관 저는 미당의 ‘하늘이나 죽음’이 신비주의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미당이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시를 쓴 시인이라고 평가한다면 ‘하늘과 죽음’은 무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볼 때 참조사항은 된다고 봅니다. 그 시절이 그랬으니까요. 지금은 미당의 작품과 행적이 미심쩍다, 문제가 있다고 제기되는 순간이잖아요. 미당이 그 시절에 살았던 것은 분명한데 당시 역사와 시대 조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고 본다면 이 기원의 개념은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영광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방향으로 투영되었겠죠. <화사집>에 24편의 시가 실렸는데, 하늘이 여러 번 나와요. 그것과 친일 시에 등장하는 하늘의 연속성이 분명 존재할 거예요. 하지만 이후의 미당 시에서 하늘은 다양하게 변주되고 동시에 심화, 확장됩니다. 미당이 불교 우주론을 가지고 와서 하늘을 상상적으로 설계하는 복잡하고 넓은 과정이 이어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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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에도 하늘이 등장하죠. 이 시는 자신에 대한 변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말씀하신 대목에서 살펴봐야 할 지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미당문학상 문제를 다루도록 하죠. 상이 제정될 당시부터 논란이 있었습니다. 거대 재벌과 보수언론이 함께 역사적 행각에 논란이 있는 인물의 이름으로 문학상을 수여하게 된 배경을 문제 삼는 목소리들이 들려왔어요. 수상자들을 상금으로 옭아매서 볼모로 삼으려는 것 아닌가하는 지적도 있었죠. 그 밖에 문학상에 관한 담론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도 있습니다.


최현식 그 논의 중 가장 치졸하고 시인들을 옭아매는 비판 중 하나가 상금을 가지고 시인들을 꾄다는 말입니다. 그건 함부로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실제 수상한 시인들을 보면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시집을 낸 사람들이고 직업도 안정적인 교수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거꾸로 물욕보다는 명예욕이 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공법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고 몰아가서 이 상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담론이 유통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황규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명예와 물욕은 뗄 수 없죠. 수상자가 대학교수라 하더라도 적지 않게 들어오는 목돈에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물욕은 자기가 추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명예와 같이 따라오는 것이죠. 일각에서 보았을 때 그것을 비난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상을 제정한 중앙일보사의 의도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최현식 항상 나오는 얘기가 3,000만 원짜리 상을 탈 수 있는 기회를 거부했다고 하잖아요. 이 말은 위험한 말이에요. 모든 문학상에 해당될 수 있어요. 제일 좋은 방법은 프랑스의 공쿠르 문학상(Prix Goncourt)1)처럼 상금을 확 줄이는 겁니다.

이명원 저는 미당문학상 제정 자체를 반대했었습니다. 결국 제정되었으니 미당 같은 분열증적 삶을 산 시인들이 받는 것은 뭐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여러 형태의 모순과 분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받을 만한 상이라는 거죠. 그런데 미당문학상이 작동하는 방식은 한국에서 가장 좋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주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내면적 분열을 겪지 않아도 되는 시인들을 너무 가혹한 시험에 들게 하고 있어요. 이제는 시인들의 분열증 해소를 위해서라도 이 상은 폐지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후보에 오른 시인들은 시인 자체로, 작가론적 견지에서도 뛰어난데 수상자가 되었을 경우 감당해야 할 비판적 여론이 있거든요. 3,000만 원이라는 상금, 사실 큰돈은 아닙니다. 미당문학상만큼 상금이 많은 문학상들이 꽤 있습니다. 다만 주요 언론사에서 시행하는 문학상이다 보니 시인들이 거부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요. 문인들한테는 상징적인 인정욕망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미당문학상을 대체할 수 있는, 모순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문학상도 있습니다.

최현식 스스로 후보에 오르는 것을 거부한 분들도 있고, 상 받는 것을 거부하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몫으로 돌려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개인들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이영광 저는 이 상의 후보로 올라가고 상을 받으면서 사실은 고심을 했어요. 미당을 전공했다는 인연, 미당의 문학과 삶에 대해 애증이 있는 사람으로서 미당과의 이상한 인연을 끊어내지 못하고, 팔자인가보다 하는 생각으로 상에 참여하고 수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미당문학상의 존폐에 대해서는 입장이 갈릴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생태계 속에서 자연스럽고 개방적인 토론을 통해 상의 위상이 변화를 겪고 바뀌어가는 식의 귀결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폐지를 주장하는 측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입장이 조금은 조급하고 논리가 성글고 거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 상에 대해 차분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분들도 많지만, 내용과 논리 없이 선동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모습은 문제가 있습니다. 폐지된다 하더라도 이 상을 두고 논의하는 과정과 방식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논의가 적극적으로 나오고 대화가 오고간다면 변화가 생길 것이고, 자연스럽게 상이 살아남거나 도태되거나 할 겁니다.

황규관 저는 당연히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당의 행적을 보았을 때 저의 윤리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자연스러운 변화의 과정은 논리적으로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만 현실에서는 절대 벌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조급한 미당문학상 폐지론자들을 비판해왔지만 만약 미당문학상의 문제점이 환기되었다면 가장 큰 공은 이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이명원 실제로 미당문학상의 존속과 폐지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대중과 독자입니다. 문단에서는 대중의 여론은 크게 의식하지 않고 문인공동체 안에서의 문제만 얘기하거든요. 현재 미당문학상 담론과 관련된 많은 부분들은 문학과 문인들의 위상과 이미지를 격하시키고 있어요. 대중 독자들의 평균적인 의식을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미당 한 사람 때문에 한국 문학의 상징적 위상이나 가치가 실추될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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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그것은 대중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태도 아닐까요. 대중의 위상이 중요하다고 해서 논의의 정확성이나 적절한 태도가 불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이명원 미당문학상 제정 과정에서 이미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고 지금 논의되고 있는 부분은 2001년 논의의 반복인 경우가 많아요. 그럼에도 후배 시인과 문인들은 그 맥락을 잘 모르고 있어요. 당시 논의들은 미당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마타도어(matador)2)가 아니었다는 거죠. 대중들과 문인들이 이 상이 폐지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단순히 SNS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당의 숱한 질곡들을 왜 후배 문인들이 감당하면서까지 결과론적으로는 미당의 옹호자가 되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저는 미당을 척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기념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의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야 문학사의 교훈을 위해 필요한 일이겠지만요.

최현식 하지만 미당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부분, 현실과 관련된 부분은 굉장히 좁게 해석하는 면이 있습니다.

황규관 그것은 연구의 영역에서 다뤄야죠. 이제 많은 사람들이 미당의 역사적인 과오와 작품에서의 과오가 드러난 것에는 동의하잖아요. 그래서 사회적인 흐름이 미당문학상을 그만두어야 하지 않는 가로 갔단 말이에요. 어떤 제도의 존폐는 항상 사회적인 맥락과 연결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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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식 SNS상의 논쟁을 보았더니 미당문학상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딱 2편의 시를 댑니다. <마쓰이 오장 송가>, 하나는 전두환 예찬 시 <처음으로>. 나머지는 없어요. 시 2편만 놓고서 이러니 없어져야 한다는 식으로 간다는 거죠. 말씀하신 사회적인 맥락은 실종되고 대중들에게는 ‘서정주는 친일파다, 전두환을 찬양했다’는 부분만 남아 있다는 겁니다.

이영광 2001년에 비해 매체환경은 확실히 변했어요. 지금 폐지론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대중을 자극하는 의미에서 마타도어가 있다고 봐요. 이런 식의 활동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명원 문인들이나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편향 중 하나가 대중들을 쉽게 동원 가능하고 선동 가능한 존재로 본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아요. SNS상의 대중은 잡계급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문학전문가들도 한 사람의 대중으로 참여하고 있죠. 대중을 획일화해서 폄하하면 안 됩니다.

황규관 독자들 중에는 굉장히 핵심을 잘 짚는 사람도 많아요. 지식인, 대중, 작가, 독자를 분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현상을 바라볼 때 관점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실제 부정적인 현상들이 벌어지고도 있지만 그 부정적인 현상들이 사회적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어요.

이영광 미당은 자기 시대의 조건과 한계 속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 문법을 창안했다고 생각해요. 미당이 시의 형식과 미학에 기여한 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문법을 창안한 사람으로 인해 동시대 또는 이후의 사람들이 시적 창조력의 차원에서 여러 도움을 얻는다고 생각해요. 미당문학상은 어떤 형태로든 작고 조용하게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폐지 얘기는 좀 더 조심스럽게 논리를 갖추어 하는 게 좋겠습니다.

황규관 문학생태계를 말씀하셨는데 자본주의 사회에는 생태계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변화 혹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생태계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거친 언어들, 과정을 불사한 언어들을 장려하거나 동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태계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고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명원 저는 미당 전집은 제대로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집에는 기본적으로 미당이 생산한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록해야 합니다. 일제말기의 친일 시, 소설, 르포, 에세이 등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집 편집자들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은폐했어요. 20권 전집에 누락된 부분 자체가 이번 미당 전집의 심각한 결격사유입니다. 학문적으로도 상당히 큰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최현식 전집 형태가 그런 식으로 나온 것도 드물고, 5년 동안 매달려서 한 거니까요.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었지만 합의되지 못한 부분, 독자 대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미당의 면모가 빠져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명원 저는 기본적으로 미당은 기념될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억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문학사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당 연구는 지속되어야 하고 치밀하게 연구될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사도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야 하고, 제도로서의 미당문학상은 시인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언젠가 폐지하는 게 옳다는 생각입니다.

김태선 미당 논쟁은 모두 아물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역사의 상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증으로 남아 있음을 방증하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여러 이견이 나온 것처럼, 논쟁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성급하게 합의를 도출하는 것보다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며 다양한 생각들을 살피는 움직임이 우리의 삶과 문학에 보다 더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하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미당에 관한 논의들이 생산적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1) 프랑스 작가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의 유언에 따라 1903년 제정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상금은 10유로이다.
2) 흑색선전, 원래는 투우 경기에서 주연을 맡은 투우사의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 토론 내용은 서울문화재단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니며 [문화+서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리 전민정_ 객원 편집위원
사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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