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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영화 <어느날> 뒷모습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때로는 겹겹의 방어막으로 무장한 앞모습보다 표정을 가늠할 수 없는 뒷모습에서 더 많은 진실과 삶의 비밀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그림으로부터, 도시에 배인 외로움과 공허함을 읽을 수 있는 이유다. 이윤기 감독의 <어느날>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등장인물들의 뒷모습이 인상적인 영화다.

영화의 틈 관련 이미지1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Edward Hopper, Nighthawks, 1942. Art Institute of Chicago, Illinois.

뒷모습이 말하는 것

“뒷모습은 스스로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마주한 이를 속이지도 않는다. 진실은 이 사이, 밝히지 않는 것과 속이지 않는 것 사이에 있다. 뒷모습이 요령부득으로 느껴진다면 이는 진실이 요령부득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사진에세이 <뒷모습>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진가 에두아르 부바와 그가 함께 집필한 이 책에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조명한 흑백 사진과 그 사진들에 대한 투르니에의 단상이 담겨 있다. 투르니에에 따르면, 누군가의 뒷모습은 진실과 가장 가까운 인간의 신체 부위다. 얼굴 근육과 달리 뒷모습은 의지로 통제할 수 없다.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뒷모습은 종종 우리가 표정과 행동 속에 감추고 있는 진실의 조각들을 드러낸다고 투르니에는 말하고 있다.
<뒷모습>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얼마 전 배우 곽도원이 들려준 <특별시민> 현장에서의 일화가 덩달아 생각났다. “최민식 선배님이 계신 현장은 늘 즐거워요. 긴장되는 순간에도 선배님이 던진 농담 한마디에 분위기가 금세 밝아지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현장에서 우연히 선배님이 어딘가로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봤어요. ‘한국영화’라는 4글자가 선배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분이 느끼는 책임감이란 내 예상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겠구나. 선배님 뒷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변화무쌍한 표정으로 대중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배우가, 표정을 가늠할 수 없는 선배 배우의 뒷모습을 통해 그가 느낄 애환을 짐작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그것이 거기에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이며, 때로는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이 삶의 비밀들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는 걸 어느 베테랑 배우의 뒷모습에 대한 일화로부터 느낀다.

영화의 틈 관련 이미지2 영화 <어느날>.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에 무엇이든 볼 수 있다

최근의 한국영화 가운데서도 등장인물들의 뒷모습이 유독 인상적인 영화가 있다. 지난 4월 개봉한 이윤기 감독의 <어느날>이다. 영화는 아내를 잃은 보험조사원 강수(김남길)와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는 시각장애인 미소(천우희)의 만남을 조명한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진 미소가 입원한 병원에서 만나게 되는데, 육신으로부터 빠져나온 미소의 영혼이 오직 강수에게만 보인다는 설정이다. 두 사람은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을 경험을 비밀스럽게 공유하는 것을 계기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간다.
<어느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홀로 남겨졌을 때조차 가슴속의 생채기를 소리 내어 표현하지 못하는 두 남녀가 마음의 빗장을 조심스럽게 풀어내는 순간이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가장 북받쳐 오르는 이때, 우리가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 이 영화의 은밀한 매력이 있다. 강수가 아내가 머물던 2층 작업실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말할 때, 혹은 미소가 낯선 장소에서 케인(시각 장애인들이 소지하는 지팡이)도 없이 길을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순간에 대해 고백할 때, <어느날>의 카메라는 스크린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을 조명한다. 이미 우리 누나를 잊은 거냐고 외치는 아내의 동생에게 애써 웃음 지어 보이는 남자와,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 앞에서조차 자신의 감정을 선뜻 드러내지 못하는 여자의 진실은 겹겹의 방어막으로 무장한 앞모습에 있지 않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밤의 어스름이 도시에 내려앉기 시작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 서로의 눈이 아니라 허공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두 남녀의 마음이 그들의 뒷모습에 맺혀 있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무엇이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들을 상상하고 짐작하게하는 뒷모습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날>의 제작진들에게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었던 화가는 에드워드 호퍼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사망한 그는 미국의 가장 번잡스러운 대도시 속 고독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예술가였다. 호퍼는 살아생전 “예술은 인간의 내면에 대한 외적인 표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왔고, 그와 숙명적으로 이어져 있는 도시 뉴욕의 일상적인 모습으로부터 이 도시에 침잠하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건져내려 애썼다.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속 등장인물들이 그렇듯, 호퍼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누구와도 쉽게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종종 그림을 보는 관객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관객을 등지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중절모 차림의 신사로부터 또 다시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끌어내곤 할 것이다.
그 남자의 낮, 그 남자의 밤, 그 남자의 직업, 그 남자의 애환…. 그렇게 뒷모습은 우리에게 세헤라자데의 운명을 부여한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이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말 신기루 같은 진실이라도, 아무렴 어떠한가. 도시의 밤과 함께, 그 남자의 뒷모습과 함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글 장영엽_ 씨네21 기자 사진 제공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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