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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5월호

작곡가 최진경의 홍은동에서의 신혼 일기그곳의 벚나무에도 눈이 내렸을까?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라 할 신혼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각별하다. 신혼 생활을 시작한 동네의 기억 또한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수식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곡가이자 에스닉 퓨전밴드 ‘두번째달’의 멤버 최진경이 알콩달콩 신혼 생활을 보낸 홍은동에서의 봄날을 떠올렸다.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

달달한 일상의 추억

4월의 어느 아침, 아이가 동네에 핀 벚꽃을 보고 “엄마, 나무에 눈이가(눈이) 왔어”라고 한다. 서울에는 벌써부터 핀 벚꽃이 지금 사는 동네인 파주에는 이제 조금씩 피어나고 있다.
나는 2007년 가을, 서울 홍은동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옆으로는 백련산이 보이고 동네의 초입에는 힐튼호텔이, 동네의 꼭대기로 올라가면 대저택이 드문드문 보이는 그런 동네였다. 그 대저택에서는 예쁜 앞치마를 한 아주머니가 “네, 홍은동입니다”라고 전화를 받을 것 같았다.
나의 신혼집은 그보다 좀 더 아래에 있었다. 집을 지을 때 오래된 나무를 자르면 동네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며 남겨놓은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와 벚나무들이 주차장 한가운데에 자리한 조그마한 빌라, 그곳이 내가 처음 가족을 꾸린 곳이다.
1층 원룸에는 해병대를 나온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매일 나무 앞에 오토바이를 주차하고는 봄에는 꽃이 떨어진다, 여름에는 벌레가 꼬인다, 가을에는 낙엽이 쌓인다며 일 년 내내 나무에게 불평하는 게 일이었다. 주차장 낙엽을 청소할 테니 한 달에 만 원씩 내라고 한 할아버지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일은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집에서 홍제천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허름한 약국이 있었다. 한번은 진통제를 사려고 들렀는데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약사님이 구석에서 먼지가 뿌옇게 쌓인 약을 꺼내주었다. 나도 모르게 유통기한을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 나와 전철역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인왕시장이 있다. 밥하기 싫은 날(밥하기 좋은 날이 언제 있었나 싶지만) 시장까지 걸어가 신랑이랑 먹었던 2,000원짜리 잔치국수는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많이 먹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신랑조차 버거워했을 만큼 곱빼기 한 그릇의 양이 푸짐했다.
그 무렵 도로 건너편 홍제천은 한창 복원 공사 중이었다. 내부순환로 아래로 흐르던 황량한 동네 개천에 어디서 왔는지 모를 예쁜 바위들이 쌓이고 물레방아 같은 다소 이질적인 풍경도 들어섰다. 홍제천 길을 따라 세검정까지 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느낌이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하는 도로에는 마구 엉켜 있는 차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럴 때면 나만 그곳의 여행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홍제역 출구 앞에는 바닥에 여러 가지를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도 많았다. 떡이나 나물은 기본이고, 요즘 생활용품을 파는 잡화점에서 볼 수 있는 실용적인 잡동사니들도 많았는데,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장난감이었다. 휴게소에서 볼 법한 뱅글뱅글 도는 강아지라든지, 누르면 소리가 나는 고무로 만든 닭 같은 것들이 돗자리에 한가득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세숫대야를 뱅글뱅글 도는 플라스틱 잠수부 인형을 보고 쓴 곡이 내가 속한 밴드 ‘두번째달’의 프로젝트 앨범, <앨리스 인 네버랜드>(Alice in neverland)에 수록된 <잠수부의 운명>이라는 곡이다.
그 당시 ‘두번째달’은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 앨범을 낸 모놀로그(monologue) 프로젝트로 활동 중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앨범을 들으면 홍은동의 아기자기한 모습들과 소소하지만 특별한 감상들이 떠오르곤 한다.

과거의 낭만에 대하여

나는 홍은동에서 3번의 벚꽃을 보고 서울을 떠났다. 조용했던 동네에 신축빌라들이 들어서고, 오래된 빈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선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일주일에 두어 번 문을 열던 허름한 약국, 가끔 외상도 해주고 덤도 많이 주던 구멍가게, 온 동네의 주차 관리를 도맡았던 해병대 할아버지, 고즈넉한 동네 속 몸도 마음도 바빠 보이던 사람들.
나는 어려서부터 쭉 서울에서 자라온 서울 토박이였지만, 서울을 떠나는 것에 큰 미련은 없었다. 파주 정도면 서울이지 뭐, 하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동네에 엷게나마 남아 있던 낭만이 없어지는 과정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왕십리에서 일을 마치고 파주로 돌아오던 길, 내부순환로를 지나는데 오른쪽으로 홍은동이 보였다. 우리 집 앞에 있던 벚나무에 지금쯤 예쁘게 꽃이 피었겠지? 해병대 할아버지는 아직도 나무에게 투덜거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날이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홍은동으로 가야겠다. 그곳 벚나무에도 예쁘게 눈이 내렸는지 보고 와야지.

글 최진경_ 작곡가. 에스닉 퓨전밴드 ‘두번째달’에서 건반과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그림 박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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