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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소설 <한 명>과 <포로들의 춤> 두 소설가가 현대사를 기억하는 방식
현대사를 다룬 소설이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출간됐다. 1940년대 만주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누이들을 다룬 김숨의 <한 명>과,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출발점으로 삼은 최수철의 <포로들의 춤>이다. 현대사의 비극과 고통에서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그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방식을 두 문학작품은 침착하게 전한다.

인간은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분투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며 ‘사라짐’에 저항해왔다. 펜으로 쓴 분투와 저항의 흔적을 인간은 문학,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쾌락과 환희보다 슬픔과 고통을 붙잡아두려는 욕망이 더 컸다. 소설은 아픈 지점들을 문장으로 붙들었다. 그 시도는 현재 진행형이다.
‘기억과 망각’을 다룬 두 소설이 나란히 출간됐다. 소설가 김숨(42)의 장편소설 <한 명>과 소설가 최수철(58)의 연작소설 <포로들의 춤>은 문학이라는 형식이 현대사를 기억하는 어떤 방식으로 읽힌다. ‘한민족의 역사이니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따위의 교리적인 주장이 아니다. ‘비극 이후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란 주제를 담백하고 침착한 문체로 써 내려간 소설들이다. 두 소설에는 군더더기가 없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비유하자면 ‘뼈만 남은’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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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데 70년 걸린 여섯 글자

위안부 마지막 생존자가 TV 브라운관에 나타나자 한 할머니가 눈을 떼지 못한다. 노인은 홀로 나직이 중얼거린다. “여기 한 명이 더 살아 있다.” 그러더니 노인은 천천히 한 글자씩 이렇게 써내려간다. “나도 피해자요.” 한 명인 줄 알았더니 다시 ‘한 명들’이 되는 순간이다.
육체는 21세기 서울에 있어도 정신은 1940년대 만주 종군 위안소에 갇힌 소녀는 강가에서 다슬기를 따다 일본군의 강압에 느닷없이 트럭을 탔다. 정신을 차려보니 귀향이 불가능한 만주였다. 삶을 끊어버릴 기회조차 없어, 일본군에게 몸을 허하고 ‘삿쿠(콘돔)’를 씻어 말렸다. 만주 땅은 지옥도였다. 군자, 희숙, 명옥, 금복, 탄실, 순덕…. 그들은 우리의 누이들이다.
증언집, 취재록, 다큐멘터리를 엮은 문장은 어찌 보면 하나의 소설로 모은 ‘증언 문학’이다. 258쪽짜리 소설에 각주만 316개. 세상의 살풍경이 인간의 허용 가능한 상상력을 뛰어넘을 때 인간은 차마 비명조차 지를 힘이 없다. 20만 명이 끌려가 2만 명만 돌아왔다는 위안부 비공식 통계 이면에서, 저 316개의 각주는 이제 사라져버린 20만 명의 삶을 응축한 번호들이며, 동시에 소설과 같은 이야기가 결코 허무맹랑한 소설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어떤 고통은 나비효과처럼

기억과 망각의 줄타기라는 점에서 김숨의 <한 명>과 최수철의 <포로들의 춤>은 서로 닮았다. 최수철은 하나로 엮이지 않은 연작소설로 하나의 이야기를 건넨다. 시공간의 출발점은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과거의 한 사건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문장으로써 내려 갔다.
세 편의 연작소설은 끊어지지만 서로 닮았다. ‘거절당한 죽음’은 1980년대로 시계를 돌려, 수용소의 비극이 포로였던 남자의 딸에게 끼친 삶의 파동을 그렸다. ‘줄무늬 옷을 입은 남자’는 2002년 붉은 악마의 응원전이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유혈전으로 바뀌는 환시를 묘사했다. ‘거제, 포로들의 꿈’은 스위스 사진 작가 베르너 비숍이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찍은 <유엔 재교육 캠프에서의 스퀘어댄스>를 둘러싼 우연과 필연의 서사를 담았다.
악몽을 현실로 경험한 이들에게 현실은 그 자체로 악몽이다. 그 악몽은 무형의 연좌제처럼 유전된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세상에서 죽지 못해 산다. 비극의 후예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의 강도가 줄기는커녕 나비효과처럼 더 커지는 아픔에 하나둘 스러진다. 한수영, 최정우, 최하람, 윤서강, 윤치형 등의 이름은 저 악몽의 경험자다.

고통을 기억한다는 것

지난 7월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소설가 김숨은 이렇게 말했다. “기억 속에서 떠돌던 이야기를 이어 붙여 복원했어요. 기억하는 분들에게 의미 있는 소설이길 바랍니다.” 최수철 소설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증언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을지 몰라도, 온몸으로 겪어낸 당시의 처참한 현실을 전달코자 했습니다.” 두 소설가의 엇비슷한 전언 앞에서 이제 하나의 물음은 불가피하다. 기억해야 하는 건 왜 즐거움이 아니고 늘 고통인가. 질문을 약간 바꾸자면 다음의 문장이 가능하다.
‘인간은 왜 고통을 기억하는가.’
니체는 어떤 책에 이렇게 썼다. “기억 속에 남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소녀에서 위안부로 전락한 타인의 생애를, 거제도 수용소의 유혈전을 경험한 포로와 그 딸의 회한을 그저 ‘타인의 고통’으로 치부하면 사실 저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지나간 일이고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타인의 고통은 바로 우리 자화상이고, 언제든 ‘나’의 이야기, 내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수전 손택은 또 이렇게 말했던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필요한 건 연민보다 내가 저 고통에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극과 악몽 앞에서 망각함으로써 공범으로 남을지, 아니면 그 지옥도를 기억함으로써 면죄부를 받을지를 두 소설은 묻고 있다. 기억과 망각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두 소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문화+서울

글 김유태
매일경제신문 문화부 문학담당 기자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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