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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사진가·다큐멘터리스트 박종우 지도가 숨긴 풍경의 집요한 기록
시민청 소리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전시 <궁을 걷다, 숨을 쉬다>는 서울의 4대 궁을 느린 호흡의 영상으로 담아내고 그 이미지와 소리, 울림을 전하는 전시다. 작가는 박종우. 다큐멘터리 마니아거나 사진에 일가견이 있다면 모를 리 없는 이름이다. 1년 중 250일 정도를 해외에 머물며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오지를 사진과 영상에 동시에 담아내는 사진가·다큐멘터리스트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과 사진집 <히말라야>를 여전히 ‘진행 중인’ 그를 누상동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박종우 사진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뚝심 있게 추진해온 사람이다. 한국에서 해외여행 자체가 쉽지 않던 1980년대에 그는 친구들과 문득 떠올린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 기업과 방송국에 도움을 요청할 만큼 배포가 있었고, 처음 히말라야를 접한 후 20년 동안 그곳을 계속 기록해야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왔다. 히말라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소위 ‘오지’라고 하는 곳을 사진과 영상으로 독보적으로 기록해온 그는, 점점 빠르게 사라져가는 소수민족의 문화와 자연경관을 조금이라도 더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1년에 250일을 해외 촬영으로 보내는 이유, 어렵게 얻은 사진에서 소수민족의 외형상 특이성보다 그들의 삶을 그윽히 들여다보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일간지 사진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안다.

대학 다닐 때 공부를 너무 안 했는데 군대 갔다가 정신을 차렸다. 운 좋게도 군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는데, 제대하고는 내가 공부한 것을 어디서 확인받을 수 있을까 하다가 신문사(한국일보) 입사 시험을 봤다. 합격해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 되어 신문사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는 전문 분야를 심화시키고 싶었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 언론사에서 사진기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발적인 뉴스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초에 친구들과 ‘히말라야에 가자’고 여행을 도모하게 됐다.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었지.
기왕 갈 거 오래 갔다 오자고 해서 반 년 정도 가기로 하고, 그렇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니 기업의 협찬을 받아보자는 얘기가 나와, 한국에서 당시 유일하게 지프차를 만들 계획이 있던 쌍용자동차에 연락했고 김석원 당시 쌍용차 회장을 만나게 됐다. 아직 자동차가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연락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시더라. 그래서 여행할 자동차와 경비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1억 3000만 원의 경비와 자동차 두 대를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다만 쌍용차의 지원 조건은 우리가 여행하는 과정이 TV에 방송돼서 차를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KBS에 다큐멘터리 기획을 제안하게 됐다. 당시 KBS는 방송사 자체적으로 다큐멘터리를 기획한 적이 없는 상태였다. 현지 안내는 여행하는 우리가 할 테니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사람만 보내주면 된다고 했지. 마침 소니에서 ENG카메라가 개발됐고, 그 카메라를 지원받아 적은 인력으로 히말라야에 갈 수 있었다.

신문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생계가 불확실한 프리랜서가 되는 건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

사표를 냈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다시 신문사에서 일했고, 결국 완전히 나온 것은 1995년이었다(웃음). 히말라야에 갔을 때, 파키스탄에서 프랑스의 촬영 팀을 만났다. 우리에게 어떻게 왔냐고 묻기에 방송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들은 ‘프로덕션’에서 왔다고 하더라. 프랑스는 프로덕션과 방송국이 분리돼 있어 방송국은 송출만 담당하고 프로덕션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시스템이었는데 한국엔 그런 개념이 없었던 차에 그들을 보며 ‘나중에 저런 프로덕션 형태의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 영화 필름 작업과 스틸 작업을 같이 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마음 속으로 ‘언젠가 영상과 사진을 같이 해봐야지’ 하고 담아뒀더랬다.
1995년 무렵은 한국에서 해외 다큐를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때였다. 사표를 쓰고 나왔는데 나에겐 카메라도 비디오카메라도 없고, 비디오카메라는 어떻게 쓰는 줄도 몰랐다. 당시 영상은 ENG카메라로만 찍을 수 있었고 그 가격이 4000만 원 정도였는데 땅을 처분해서 결국은 카메라를 샀다. 지금은 카메라로 찍고 컴퓨터로 편집하면 되지만, 당시에는 레코더와 플레이어가 따로 필요했다. 각 2000만 원씩이었는데 그걸 더 살 수는 없어서 포기했다(웃음).

첫 영상 작품은 무엇인가.

베트남을 찍고 싶어서 ENG카메라를 들고 갔는데, 큰 장비를 가져가니 촬영 허가를 받아야 한대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가 구정 무렵이었는데 동남아의 새해 풍경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까 싶어서 그거라도 찍자 했다. 사실 영상에는 문법이라는 게 있는데 나는 그걸 전혀 모르니 찍었어도 한심한 수준이겠지. 다큐멘터리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가 찍어온 것을 지인에게 보여주고 나서 여기에 어떤 스토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 문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찍어가면서 배웠다.

1997년에는 오지를 다룬 <몽골리안 루트>를 작업하셨다.

다큐에는 작은 것(꼭지 프로그램)과 큰 것이 있더라. 교통방송에서 만드는 해외여행 꼭지 프로그램을 맡고 있던 중에 방송사로부터 의뢰받아 하게 된 작업이다. 몽골리안이 지금의 몽골에서 생겨났지만 대륙을 광범위하게 이동하며 퍼져나간 민족이다. 서쪽으로는 유럽 바이칼 호수, 동쪽으로는 남미 대륙 끝까지 도달해 있다. 기회가 올 때마다 그들이 이동한 지역을 찾아다니며 기록하고 싶은 프로젝트다.

1997년에 IMF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고는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해외 촬영이 많은 프로그램 기획의 특성 때문에 제작비가 크게 늘어난 탓이었다. 그때 박종우 작가는 게스트하우스를 잠깐 운영했다고 한다. 60대에 하고 싶었는데 시기를 잠깐 당겼다며, 한국 최초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던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빈번하게 받는 질문 중 하나는 프리랜서 사진가로서의 불확실한 생계에 대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프로덕션 ‘인디비전’의 대표인 그는 주로 영상을 제작해 수입을 얻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영상에는 다양한 포맷의 다큐멘터리, 교양 프로그램이 포함된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인생의 기회라는 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를테면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 같은 작품 말이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1 소금 짐을 짊어지고 차마고도를 지나는 야크 무리.
2, 3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
4 하늘빛과 물빛이 서로 똑 닮아 있는 히말라야의 호수.
5 티베트 차마고도에서.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이하 ‘차마고도’)는 그런 오지에 대한 관심, 기록의 의지가 집약된 대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차마고도 얘기를 좀 해보자.

차마고도는 KBS 출신 작가 세 명이 프로덕션을 만들어서 기획한 작품으로 내가 연출을 맡았다. 그들은 촬영을 모르니 PD가 있어야겠다 싶어 나에게 연출을 맡겼다. ‘전 세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이 중국 근처에 있는데 거길 찍어서 다큐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에서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차마고도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자료 수집 과정에서였다. 어디든 촬영이나 취재를 가면 자료를 모으는 게 일이다. 중국 윈난(雲南)성 근처에 갔다가 자료를 찾으러 들른 서점에 사진 하나가 붙어 있었다. 아주 인상적인 인물 사진이라 서점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자신이 3년 전에 찍은 사진이라고 하더라. ‘캄파’라고 했다.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한국일보에 재직할 때 티베트(라싸)에 민주화 폭동이 일어난 후 계엄령이 떨어진 적이 있다. 히말라야에 가고 싶어서 파키스탄으로 돌아가다 결국 못 갔는데, 중국 기자의 도움을 얻어 라싸를 촬영하게 됐고, 한국일보에 특집기획 기사로 나갔다. 그런데 라싸에 갔을 때 한눈에 봐도 독특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캄파’라고 했다. 티베트 라싸 동쪽 지역인 ‘캄’ 사람들인데, 캄은 중국 정부가 외부에 공개하기를 꺼리는 미개방 구역이었다. 그곳을 찍고 싶었는데 라싸에서 차로 닷새가 걸린다기에 못 들어갔지. 그런데 나중에 서점에서 그들을 사진으로 만난 것이다. 캄파가 지나다니는 길이 ‘차마고도’다.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한국에서 인류학 연구를 하시는 분의 도움을 얻어 윈난성민족대학과 닿았고 그곳을 통해 캄 지역에 처음 들어가 촬영할 수 있었다. 카라반 양쪽에 소금 염전이 펼쳐져 있는데 촬영 도중 말에 부딪혀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카메라도 부서졌다. 죽을 고비를 넘겼지. 당시 찍어놓은 테이프 분량은 9시간 정도 였다. 보통 한 편의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 때 그것의 50배 분량을 소스로 찍는 편이니 내가 찍은 걸로는 한 시간짜리를 만들기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작가들이 한 회를 만들어 팔고 여유 자금이 확보되면 다시 찍자고 했다. 방송사가 다행히 호의적으로 나와서 저작권을 우리가 갖는 것으로 하고 프로그램을 판매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차마고도에서 촬영을 마저 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정말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작업에서의 진정성, 현지인에게 다가갈 때의 노하우가 있다면?

다큐를 만드는 데 가장 큰 노하우는 정보를 얻는 것이다. 사전 작업이 제일 중요하다. 외국 출장을 가기에 앞서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많이 보는데 그런 자료 수집이 작업에 많은 도움을 준다. 사람들이 모르는 걸 찾는 게 중요한데, 지금처럼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좋은 자료를 잘 선별해내는 능력도 필수다. 사람에게 접근하는 데에는 진정성이 필요한데 이는 오랜 시간을 두고 생기는 것이더라.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히말라야론’에 대해 궁금하다.

1980년대에 처음 히말라야에 갔는데, 설산의 그 압도적인 스케일은 한국의 2000m가 채 안 되는 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거기에는 마약 같은 흡인력이 있는데, 산을 보면 ‘그 산 뒤에 뭐가 있을까’가 점점 궁금해진다. 그래서 계속 관심을 갖게 된다. 그 산의 뒷모습이 궁금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궁금하고, 실제 돌아서 뒤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그 사이 다니는 길이 느껴지고 자주 다녀보면 거기에 사는 사람의 삶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게 된다.

오랫동안 해외 오지를 돌아다니며 작업을 많이 하셨는데, 최근에는 임진강과 DMZ 작업도 하고 계시다. 그 중요성에 순위나 계획이 있는지.

계획은 아니었고 해외 작업을 내가 더 잘하기도 해서 해왔다. DMZ 작업은 2009년에 TV조선에서 DMZ 다큐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고 시작했는데, 막상 갔더니 다른 모습이 많이 보여서 국내에도 신경을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해보니 분단 문제에 관심을 점점 갖게 되고 기록해놓을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청 소리갤러리의 기획전시 <궁을 걷다, 숨을 쉬다>가 진행 중인데. 궁을 촬영하면서 우리 것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가 되었을 것 같다. 작품이 무척 아름답다. 건축 외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은 ‘우리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궁 역시 처음에는 일로 시작하다 관심을 갖게 된 케이스다. 하다 보니 내가 우리 고건축을 찍은 게 너무 없더라. 시간이 압축적으로 흘러가다 보니 아마 못 했을 것 같다. 건축 얘기를 하자면, 한국의 고건축은 우리 눈으로 보기엔 좋은데 사실 정교한 장비로 촬영하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다. 수직선이 안 맞는다거나 수평이 안 맞는다는 게 보이니까.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더라. 서양 건축은 딱딱 맞으니 그 독자적인 미학을 살피게 되고, 우리 건축은 자연과 섞여 있기도 해서 계속 같이 담게 된다. 강운구 선생이 영상을 보며 “눈 내리고 비오지 않으면 촬영이 안 되겠구먼” 하시는 거다(웃음). 그 말이 맞다. 영상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것 중엔 눈, 단풍, 신록과 어울려서 아름다운 게 많다.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는 것도 찍으려고 한다. 그런데 지자체가 개입하면서 영상 하는 사람은 작업하기 힘들어지는 부분이 있다. 한양도성 같은 경우도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는 게 좋은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이것저것 손을 대 못 찍게 된다. 조명을 설치하고 데크를 놓으면 관람하기에는 좋지만 찍는 사람 입장에선 그렇게 다듬어지기 전의 원형을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든다.

프로젝트 중 다시 하고 싶은 것, 계속 앞으로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시민청 전시<궁을 걷다, 숨을 쉬다> 포스터.

애초에 차마고도는 방송을 위해 시작한 것이었고 캄 지역의 일부에 불과하다. 캄 지역은 무척 독특한 곳이다. 위쪽은 캄, 아래는 암도여서 이곳을 캄암도 지역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곳을 없애고 싶어 한다. 원래 티베트는 독립국이었고, 중국과 티베트 사이에 있는 캄암도 지역은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완충 지대지만 티베트에 좀 더 가까운 문화를 지닌 지역이다. 1950년에 6·25전쟁이 발발해 그곳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을 때 중국에서 캄 지역을 네 개로 쪼개놓았다. 캄은 독립국가도 못 되기 때문에 중국에 저항할 수도 없었고, 이곳을 점령한 중국은 1959년에 티베트까지 점령한다. 티베트도 이제 거의 중국화되었지만 캄 지역에 티베트적인 것이 티베트보다 많이 남아 있어서 무척 흥미롭고 알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캄 지역 사람들은 호전적이다. 원래 네팔과 중국을 넘나들며 무역을 해온 사람들인데, 이렇게 떠돌아다니며 무역하던 사람들이 계속 없어지고 있어서 그들도 기록하고 싶고, 남아메리카 남단에 살고 있는 몽골리안도 기록하고 싶고… 계속해서 기록하고 싶은 것이 많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치 있는 것이 많이 사라지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매력이 강하고.

참 아이러니한 것도 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진을 찍었다. 어릴 적 집 대문을 열고 나가면 문 앞에 대장간이 있었고 거기 소와 말이 묶여 있었다. 그런데 아무 사진이나 찍고 다니면서도 그 풍경 한 장을 못 찍어둔 게 너무 아쉽다. 그때도 창경궁 같은 곳을 다니며 사진 찍었는데 사실 그런 곳은 지금도 별로 변화된 모습이 없지 않나. 지금 작업실이 있는 누상동에서도 한번 찍어둬야지 싶던 사소한 풍경을 금세 놓치고, 오래된 가게가 없어지는 걸 종종 겪는다. 이런 일상의 풍경을 기록할 가치도 충분하다.문화+서울

진행 김영호
서울문화재단 경영기획본부장
정리 이아림
사진 김창제
작품 사진 제공 박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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