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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동네의 문화 복덕방으로 자리 잡는 작은 책방들 아무 일도 없는 저녁엔 작은 책방에 가자
책방, 서점은 뚜렷한 목적 없이도 편하게 들어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도시에서 드물게 문턱 낮은 상업 공간이다. 매체 다변화 등으로 출판계가 오랫동안 불황을 겪으면서 서점 역시 작은 서점은 고사하고 대형 서점만 살아남는 양상을 보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뚜렷한 개성을 지닌 작은 책방이 곳곳에 생겨나며 동네 친구이자 문화의 복덕방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기왕이면 오래 만나고 싶은 곳들이다.

1, 2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서점 ‘시티 라이츠’ (사진 1)와 서교동의 독립출판물 전문 서점인 ‘유어마인드’의 내부 모습. 작지만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은 책방들이다.1, 2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서점 ‘시티 라이츠’ (사진 1)와 서교동의 독립출판물 전문 서점인 ‘유어마인드’의 내부 모습. 작지만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은 책방들이다.

오랜만에 일이 일찍 끝났다. 갑작스레 약속을 잡기는 번거롭고, 그렇다고 집에 바로 들어가기는 싫다. 그럴 때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주변 사람 신경 쓸 필요 없는 영화관, 혼자 온 손님도 반기는 카페나 맥줏집, 제법 깔끔해진 만화방과 PC방도 좋다. 하지만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서점은 어떤가? 대형 서점에선 보기 어려운 별난 책을 뒤적이고, 조심스레 튕기는 통기타 연주를 듣고, 낯선 이들과 따닥따닥 붙어 앉아 영화를 보며 맥주 한잔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데가 어디에 있느냐고? 그런 데가 있다. 자꾸 늘어나고 있다.

가난한 여행자도 환영하던 바다 건너 책방들

20여 년 전, 대학생일 때 학교 앞 서점은 생활과 사교의 중심이었다. 갑작스러운 강의 취소로 시간이 붕 떠버리거나, 저녁에 특별히 할 일이 없거나, 일요일의 하숙집이 너무 지겨울 때, 나는 일단 책방으로 갔다. 추운 날이든 더운 날이든 상관없이, 책방은 입장료도 없이 나를 반겼다. 나는 서가에 꽂힌 책들의 위치를 훤히 꿰고 있었고, 새로 온 몇몇 책은 알바비만 나오면 바로 데려가겠다며 찜했다. 그러다 보면 아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같이 밥이나 먹을까, 당구나 칠까? 또 그러다 괜찮은 여학생이 들어오면 은근슬쩍 주인 아저씨에게 정보를 캐보기도 했다. 학교 앞 작은 서점이 없었다면 우정도 사랑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서점 자체가 사실상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러던 책방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출판 시장이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인터넷 서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동네 서점의 입지가 쪼그라들었다. 광화문이나 강남에 있는 대형 서점만 겨우 살아남았고, 동네에는 중?고등학생의 참고서를 파는 서점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내 안에서도 작은 서점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 희미해져갔다. 비를 피하기 위해 무작정 서점에 뛰어들어갔다가, 문득 마음에 꽂힌 시집의 첫 장을 넘길 때의 두근거림 같은 것 말이다.
뜻밖에도 그 기억은 바다 건너에서 되살아났다. 언젠가 파리로 여행을 가 오르셰 미술관 뒷골목에 숙소를 정했다. 첫날 저녁을 때우려고 터덜터덜 동네를 둘러보다 작은 서점을 만났다. 여행 지도라도 사볼까 해서 들어갔다가 따뜻한 정취에 취해버렸다. 그러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만화 <코르토 말테제>에 관한 책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편한 의자까지 있어 한동안 책에 빠져 있는데, 미국인 여행객 커플이 나를 툭 쳤다. 무슨무슨 카페는 어떻게 가냐고? 서점 하나가 순식간에 나를 그 동네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여행을 가면 그 동네의 작은 책방을 먼저 찾아둔다. 매일의 여행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아지트 같은 곳으로 삼는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비트 시대를 상징하는 위대한 서점 ‘시티 라이츠’에 매료당했다. 하지만 돌로레스 공원 옆 헌책방,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책 더미 아래서 수동 타자기를 열심히 치던 히피 노인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블루 스타킹’은 체제와 상식에 저항하는 진보의 냄새가 가득한 책방이었다. 단돈 1달러로 커피를 산 뒤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소호에 있는 ‘하우징웍스’는 에이즈 보균자의 주거 사업을 위해 시작한 헌책방인데, 안쪽의 멋진 카페 자리에서는 뷔욕 같은 세계적인 뮤지션들의 공연도 열린다고 했다. 뉴올리언스에서는 오래된 책방의 위치만 표시한 지도를 구해 돌아다녔는데, 그들은 작지만 서로 다른 개성으로 하나하나 선명한 색채를 만들어냈다. 모두가 작고 아름답고 생기발랄했다. 당연히 생각했다. 이런 책방이 서울에도 있으면 참 좋겠다.

‘동네 친구’ 같은 작은 책방의 등장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나 보다. 지난 몇 년 동안 서울 곳곳에 작고 특이한 서점들이 파릇파릇 피어나고 있다. 동네 서점처럼 학습지나 참고서를 파는 것도 아니고, 대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처럼 너무 진지하지도 않다. 작지만 색깔 분명한 책으로 가득 차 있고, 책을 중심으로 갖가지 문화를 즐기게 한다.
홍대 앞 주차장 골목에 있는 ‘땡스북스’는 디자이너, 화가들이 즐겨 다니는 거리에 맞게 미술, 건축,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책을 구비해놓고 있다. 주기적으로 선정하는 테마 도서에 대한 신뢰도도 아주 높다. 산울림소극장 근처의 ‘유어마인드’는 독립 출판물과 개성이 강한 해외 출판물을 주로 소개한다. 연남동의 ‘책방 피노키오’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방이다.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포르투갈, 체코, 인도 등의 그림책까지 소량씩 들여와 희소성 있는 컬렉션을 만들고 있다. 북촌 계동의 ‘무사’는 주인이 좋아하는 시집들이 작은 컬렉션을 구성한다.
단지 책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땡스북스’ 등 여러 서점이 북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의 전시 공간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 강연이나 워크숍뿐만 아니라 작은 연주회도 즐겨 벌어진다. 이대 전철역 근처에 있는 ‘퇴근길 책 한잔’은 말 그대로 책과 함께 맥주 한잔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주인의 동네 친구가 하루 저녁 요리 모임을 진행하기도 하고, 책 낭송회와 영화 보기 등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이들 서점의 벽에는 주변의 재미 있는 전시, 벼룩시장, 이벤트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동네의 작은 문화센터 겸 문화 복덕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진작에 이런 걸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과 더불어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런데 오래오래 잘 버틸 수 있을까?’ 쉽지는 않다. 헌책과 디자인 소품을 팔던 서촌의 ‘가가린’이 문을 닫는 등 많은 책방이 월세 부담에 힘겨워하고 있다. 책을 소량씩 취급하기 때문에 도매상이나 출판사와 거래를 트기도 어렵다. 그래도 서로 손을 잡고 많은 일을 벌이고 있다. 2015년 10월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는 7개 도시, 23개 소규모 책방이 모여 ‘책집’이라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문화+서울

글 이명석
문화비평가 겸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행의 즐거움과 인문학적 호기심을 결합한 <여행자의 로망백서>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도시수집가> <모든 요일의 카페> 등의 저서가 있고, KBS 라디오 <신성원의 문화공감>,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에 고정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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