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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보라매공원에서의 특별하거나 그렇지 않은 순간들 그곳엔 보랏빛 새가 있었을까
황인찬 시인의 시에서 공원의 이미지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보라매공원의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다. 어릴 적에는 휑하고 넓은 공간에서 보랏빛 새가 숨어 있을까 궁금해했고 시간이 흘러서는 연인과 산책하며 어둠 속에 비밀과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이라 느꼈다. 보라매공원은 시인에게 특별히 다르지 않으면서 묘한 특별함을 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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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 낮은 빛 속 무료한 공원의 풍경

어릴 적 그 이름을 듣고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모 댁이 그 근방이었던지라 자주 놀러 가곤 했는데, 그때는 ‘보라매’라는 명사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보람의 공원’ 정도로 생각하며 엄마에게 우리 ‘보람의 공원’ 가요, ‘보람의 공원’이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후에 ‘보라매’라는 동물의 이름을 따온 것임을 알아차린 뒤에도 보라색의 독수리 정도를 떠올린 기억이 난다. 그게 공군사관학교의 상징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아주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어릴 때는 공원이 정말 넓게 느껴졌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아서 세상에 이렇게 넓은 곳이 있다니, 싶었다.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는 이렇게 넓은 공터가 있다는 것도, 도시 한가운데에 식물이 이렇게 많은 것도 신기하게 느껴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게 내가 본 최초의 공원이었다. 잔디가 많고, 나무가 많고, 사람이 많고, 아이스크림을 팔고, 과자를 팔던 곳. 어릴 때에는 지금처럼 산책 나온 개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 살 터울의 남동생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던 곳. 비둘기를 보면서 저게 혹시 보라매일까 혼자서 생각해보던 곳. 무슨 보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보람이 없어도 그저 걷는 것만으로 충분해지던 곳. 그것이 내 최초의 공원에 대해 남은 기억이다.
나는 시에 공원의 이미지를 자주 끌고 오는 편인데, 돌이켜보면 공원에 대한 결정적인 이미지를 제공 받은 것이 그 어릴 적의 보라매공원이었다. 나무가 늘어선 길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긴 길을 지나면 등장하는 휑한 공간들. 그 휑한 공간을 채우던 온도가 낮은 빛(어째서인지 공원의 빛은 한여름이 아닌 이상 온도가 낮다는 인상을 준다), 걷는 사람들과 개들, 그 이리저리 흩어진 무료함이 나에게 퍽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공원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 그곳의 풍경이었다.

밤 산책에서 마주친, 이따금 생경하던 사람 풍경

지금은 헤어지고 만나지 않는 옛 연인도 보라매공원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종종 보라매공원을 함께 산책한 기억이 난다. 서로 바쁜 학생이었기에 주로 낮보다는 밤에 만났는데, 밤의 공원은 낮의 공원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토록 조용한 어둠속에 길게 늘어선 가로등의 빛과 서늘한 밤공기에 섞여 오는 공원 특유의 풀 냄새와 걷다 마주치는 낯선 이들로부터 전해오는 미묘한 긴장감, 낮에는 들리지 않던 작은 생물들의 소리까지, 밤의 공원은 뭔가 비밀이나 숨겨진 이야기가 많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연인과 밤에 공원 걷기를 좋아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혹은 아무런 말도하지 않으면서 그냥 걷는 것이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 충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인상 깊었던 순간 몇 가지.
하루는 운동장을 따라 원을 그리며, 수많은 사람이 줄지어 걷고 있었다. 멀리서 그것을 보고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는 연인에게 물었다. “저거 봐, 너무 이상하다.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저렇게 자꾸 돌고만 있는 걸까. 무슨 종교 집단 같은 게 아닐까.” 나의 연인은 나에게 기가 막힌다는 듯이 그저 운동하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대답해주었고, 그 말을 듣고도 나는 그 사람들이 너무 이상하게만 보였다. 거의 백 명 가까운 사람이 말없이 운동장을 돌고만 있었으니까.
또 하루는 연인과 연못가의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아주머니 하나가 신발을 벗고 나무에 오르고 있었다. 자꾸 미끄러지면서, 무엇인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그것은 자세히 들어보면 “주여, 용서 해주시옵소서”라고 빠르고 작게 웅얼대는 것이었다. 나는 저러다 다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었지만 아주머니는 어쩐지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를 내면서 나무를 자꾸 오르고 있었다. 연인과 나는 어딘가 공포스러운 기분 속에서 그 아주머니를 지켜보았고, 아주머니는 나무 위에 결국 올라서서는 주여, 주여, 큰 소리로 몇 분간 외치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곳을 떠나갔다.
또 어떤 눈 내리던 밤, 휘날리는 눈이 가로등 불빛 속에서 빛나는 것이 도무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 밤.
또 여기 다 옮겨 적지 못할, 그 많은 놀라운, 아무것도 아닌, 그런데도 생생하고 생경했던 순간들.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면 공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때가 많이 떠오른다. 다른 어떤 공원과도 특별히 다르지 않은 공원이면서, 너무나 특별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던 시간. 보람의 공원, 보람도 없이 의미도 없이 그저 걸었던 공원, 보랏빛의 어떤 새가 어딘가에 꼭 있을 거라고, 어린 시절 생각했던 그 공원.
그곳에서의 기억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시를 만들어주었는지 모르겠다. 그곳이 특별한 공원이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나의 특별한 기억이 그곳에서 많았다.문화+서울

글 황인찬
1988년 안양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가 있다.
그림 Meg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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