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COLUMN

5월호

심리지리학 기법으로 북촌 산책하기 '서울 단상' 사용법
초행길이라도 스마트폰 지도 앱만 있으면 찾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발달된 도구는 목적을 더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데 동원되곤 한다. 걷기, 산책은 어떨까. 뚜렷한 목적이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는 일’을 ‘낭비’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한 번쯤 마음 내키는 대로 걷고 마음이 추동하는 것을 기록해보자. 이런 걷기 방식을 ‘심리지리학적 걷기’라고 한다.

서울단상 관련 이미지

이 항목들은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이 2005년 ‘자기만의 길(A Road of One’s Own)’* 이라는 칼럼에서 ‘심리 지리학 초심자를 위한 지침’으로 소개한 내용을 10년 뒤인 오늘날 서울의 정황에 맞게 번안한 것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심리 지리학적 걷기’는 한 세기 전 상황주의자들이 일상의 권태로부터 벗어나 도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경험하기 위해 고안한 예술 운동의 일환입니다. 목적지를 향하는 걷기나 무언가를 소비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걷기에서 벗어나 조금 덜 스마트한 걷기, 스마트폰 없이 걸어보기를 권합니다. 변화하는 거리의 환경에 반응하는 자신의 정서와 감각을 세밀하게 의식하는 일련의 탐구를 심리지리학(psychogeography)이라고 정의한다면, 가장 성공적인 ‘심리지리학적 걷기’란 도시에 젖어들어 경로를 따라 걷고 있던 사실조차 잊게 되는, ‘길 잃기를 위한 걷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심리적 감각으로 걷기, 마음이 끌리는 대로 천천히

저는 심리지리학적 걷기가 북촌에도 통할지 실험해보고자 무작정 안국역행 지하철을 탔습니다. 인사동은 서울 시내에서 종이로 된 지도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안국역 1번 출구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얻은 뒤 돌 벤치 위에 펼쳐놓습니다. 광화문과 인사동, 삼청동, 북촌 일대를 확대해서 다루는 상업성 무가 지도입니다. 다 마신 테이크아웃 커피 컵을 지도 위에 무심코 떨어뜨립니다. 북촌 한옥마을이 간택되었군요. 최대한 원에 가까이, 노란색 형광펜으로 예상 경로를 그려 넣습니다.
정독도서관 정문을 지나 원두 볶는 냄새를 맡으며 골목길로 접어듭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인적이 드문 쪽을 선택하면 대부분 원에 가깝게 걷게 되곤 합니다. 돌로 쌓아 올린 벽을 만지면서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자 이내 손에 든 지도가 거추장스럽습니다. 지도는 주머니에 넣고 마음속 경로와 나의 위치를 비교하며 걷습니다. 마음의 지도는 심리적 거리 감각에 의해 왜곡되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정북 감각이 흔들리며 마음이 쏠리는 장소에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의 감각에 이끌려 발걸음마다 그 모습을 바꿉니다.
한 시간 거리를 걷고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 지도 위 다각형을 비교해보니 예상 경로의 반도 채 안 되는 거리를 걸었네요! 다음 일정이 임박해오자 저도 모르게 더 큰 각도로 방향을 전환하며 다각형을 좁힌 것 같습니다. 1:1000 축척에 테이크아웃 컵 톨사이즈의 조합이라면 한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걷기위해 한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엔 1:250, 2시간에는 1:500, 3시간에는 1:1000 축척 지도를 권합니다.

서울단상 관련 이미지

서울, 시간의 콜라주를 실험할 수 있는 도시

지도상에 북촌 8경으로 표시된 지역과 제가 우와! 했던 풍경도 전혀 다르더군요. 북촌을 소개하는 책이나 기사에서 한 번쯤 보았던, 포토그래퍼의 멋진 사진보다 절경을 뿜어낼 수 있는 현실 속 공간은 없나 봅니다. 오히려 북촌 관광 안내 지도의 변방에 있는 북촌로11길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지도상에서도 한눈에 찾을 수 있는 독특한 반달 모양의 필지 둘레를 감싸고 있는 길입니다. 언덕배기 고개를 넘어 모퉁이를 돌자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벚꽃과 안개, 그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기와지붕들은 4월 9일 토요일 오전 10시에만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의 정신이자 의외의 기쁨이었을 겁니다.
제 마음을 가장 강하게 붙든 것은 소리였습니다. 북촌에서 내려오는 북촌로15길 초입부터, 올라갈 때는 들리지 않던 물소리에 귀가 기웁니다. 시멘트로 마감한 좁다란 계단과 경사로 옆에 난 작은 도랑으로 물이 빠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걸어서 10분 거리의 경복궁까지 출퇴근하는 고관대작들의 거주지였던 북촌은 북악산 기슭에 자리한 고지대여서 물이 지반 아래로 흘렀고 양반가 집집마다 물이 귀했습니다. 벼루 씻는 물, 머리 감는 물, 밥 짓는 물, 빨래하는 물의 수원지가 달랐고 용도별로 유명한 물을 길어다 하루 두 번씩 배달하는 물장수들이 서울 시내에 아주 많았습니다. 1908년 근대적 상수도 설치 이후 1970년대까지도 여전히 지대가 높거나 수도꼭지는 설치되어 있더라도 급수가 어려운 가옥이 드물지 않았고 서울 시내에서 물장수를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내리막길을 따라 지대가 낮아질수록 물소리는 더 커져서, 삼청로에 이르자 맨홀 뚜껑에 난 구멍으로 콸콸대는 소리가 뿜어나오다 인파와 차 소리에 이내 흡수됩니다. 시인 김동환의 시 속의 한옥, 안방의 창문 틈으로 들는 물 쏟는 소리, 옹기로 만든 물 저장소, 수기로 물 배달을 확인하는 나무판 물표, 가벼워진 물지게를 지고 내려왔을 이 삼청로 비탈길을, 밟은 채, 상상합니다. 600년 도성 서울은 물리적 길 잃기뿐 아니라 시간의 궤적마저 잃기에 최적인 도시입니다. 임의의 원을 따라 걷는 가운데 나만의 서울 단상 채집을 엮고 기워 ‘시간의 콜라주’를 실험해볼 수 있는 곳이죠.
여러분, 지도를 펴고 컵을 올려놓으세요!문화+서울

  • * 자기만의 길 (A Road of One’s Own) Robert MacFarlane, ‘A Road of One’s Own’,(2005. 10. 7)
글 김린
도시 속에서 디자인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 1인 출판사 겸 심리지리학 연구소인 ‘서울할머니(seoul grandmother.com)’를 운영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겸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그림 Meg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