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는데, 전공과 무관한 극작가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궁금합니다.
졸업학기에 국가보훈처 내 보훈교육연구원에 취직해서 일한 적도 있고, 한때 다큐멘터리 방송작가 일도 재미있게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글쓰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라푸푸 서원’이라는 희곡 창작을 가르치는 곳이 있더라고요.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 좋았어요. 희곡 한 편을 완성하고 단막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리는 3개월짜리 과정이 있었는데, 두 번을 들었어요. 그때 완성한 작품이 철거 직전의 만화방 이야기였죠. 돌이켜보면 저에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라푸푸 서원’에 다닐 무렵엔 직장을 거의 관둔 상태여서 소속감이 필요했어요. 학교에 들어가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문사 과정에 들어갔죠.
기존 작품들을 보면 우발적으로 친구를 죽인 소년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배척받는 사람 등 극적인 사건과 이에 직면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학창시절 인간 심리에 대해 공부했던 경험이 희곡을 쓰는 데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까요?
학교에선 상담심리나 임상심리를 주로 배웠는데, 제겐 처음 만난 세상의 모습이 상담 사례였어요. 사람들은 평범한 듯 멀쩡한 듯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잖아요. 그걸 어떻게 극복할지 관심이 많았죠. 어떠한 방법으로도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사건들을 같이 고민해보고 싶었어요.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내 자식이 살인자가 될 수도 있고, 내 친구 중 누군가가 성소수자로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는 거죠.
1~4 이보람 작가의 작품 포스터. <소년B가 사는 집>, <네가 있던 풍경>, <네 번째 사람>, <기억의 자리>.
2013년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 마인즈’로 선정된 <소년B가 사는 집>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셨죠? 신춘문예에서 몇 년간 고배를 마신 끝에 얻은 결과여서 더 의미가 있었겠어요.
공모전에 내고 발표가 나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는데, 당시 모아놓은 돈이 다 떨어져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어요. 출근한 지 일주일 지났는데 1차 합격했다는 거예요. ‘어떡하지? 회사에는 열심히 다니겠다고 했는데…’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선정되고 나서 긴 시간이 주어졌는데, 무대에 올라가기까지의 전체 기간을 계산해보면 1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기존 작품의 줄거리를 보면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경우가 많은데요. 14살에 살인을 저지른 소년범 이야기를 담은 <소년B가 사는 집>도 모티브가 된 사건이 있었나요?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가해자의 어머니에 대한 신문기사를 봤어요.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일어난 콘크리트 매장 사건도 인상 깊게 봤는데, 그런 사례가 섞인 것 같아요. 미국에는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이 만나는 모임이 있지만, 일본에서는 가해자의 가족까지도 범죄자로 보는 시선이 강해요. 마치 연좌제처럼요. 그런 가해자 가족의 삶을 다뤄보고 싶었어요.
글을 쓰고 싶어졌을 때 소설이나 시가 아닌 희곡을 선택했다는 말이 인상 깊었는데요. 특별히 극작에 매료된 이유가 있었나요?
연극은 협업이라는 점이 좋았어요. 소설이나 만화에는 배우나 관객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데 희곡에는 여백이 많으니까요. 어떤 배우가 움직이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니까 배우를 위한 빈자리를 남겨놓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좋은 연출과 배우들을 만나면 거기 업혀가는 느낌이에요. 그만큼 의지가 많이 되죠. 특히 연극은 관객이 완성한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작품을 쓰는 사람은 저지만, 이걸 연극으로 구현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단계로 넘어가면 더 이상 제 몫이 아니죠.
어떤 면에서 그런 관객의 힘을 느끼나요?
<소년B가 사는 집>을 공연할 때였는데, 우리나라도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니까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이 있거든요. 그 보호자들이 와서 연극을 보고 자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주인공인 대환이의 모습에서 내 아이를 보는 것 같다면서요. 저희 아버지는 꼿꼿하던 대환이 아버지가 보호관찰관에게 잘 보이려고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너무 슬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삶과 맞닿는 부분에 반응하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관객이 연극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연극의 여백을 채워주는 모습이 좋았어요.
그간의 작품 제목을 훑어보면 <네 번째 사람>, <두 번째 시간>처럼 나름의 규칙, 이를테면 제3자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항상 외부인의 시선으로 글을 쓰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건 당사자보다 그 주변부의 시선으로 쓰거든요. 저는 스스로를 주변부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다 함께 모여 있을 때도 제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으면 불편하고요. 가운데보다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게, 더 잘 보고 더 오래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두 번째 시간>은 2016년 남산예술센터 상시투고시스템 ‘초고를 부탁해’에 선정된 후, <서치라이트 2017> 프로그램 낭독공연을 거쳐 올해 공연이 성사되었죠? 그만큼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요.
당시에 제 동기들이 한 번씩 상시투고에 지원했는데, 작품에 대한 메일이 길게 온다고 해서 저도 코멘트를 받고 싶어 지원했어요. 몇 년 전에 김주연 평론가가 “희곡 쓴 게 있냐”고 물었는데, 이참에 남산예술센터에 원고를 보내면 따뜻한 마음으로 읽어봐주겠거니 싶더라고요. 누군가 내 작품을 궁금해하고 보고 싶어 한다면 신인 작가에게는 큰 힘이 되거든요. 당선 여부를 떠나 작품을 꼼꼼하게 읽어봐주는 것 자체가 고맙죠.
2014년 <소년B가 사는 집> 연출을 맡았던 김수희 연출가와 이번 작품에서 다시 만났는데요. 두 분의 호흡은 어떤가요?
그 공연으로 국립극장 무대에도 갔어요. 같은 공연으로 두 번 만났고, 이번이 세 번째죠. 김수희 연출은 돌려 말하지 않고 항상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또 좋게 말하면 제 스타일이고 나쁘게 말하면 제 구멍인 부분에 대해서도 잘 아시죠. 이전에 호흡을 맞춰봤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좋아요. 제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명확한 논리를 갖고 있거나 정확한 결말에 도달하지 않는데, 그걸 제 스타일로 이해하고 살리는 방향으로 가주시죠.
5 <서치라이트 2017> ‘두 번째 시간’ 낭독공연.
6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르는 <두 번째 시간>.
<두 번째 시간>이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제목에 담긴 의미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주인공인 할머니는 독재정권하에서 남편을 의문사로 잃었는데요. 사실 고 장준하 선생의 부인이셨던 김희숙 여사가 모티브가 됐어요. 어떻게 크고 작은 시련을 버티며 살아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죠. 제가 봤을 때는 그게 보통의 삶은 아니거든요. 만약 남편이 그때 죽지 않았다면, 혹은 죽음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졌다면 주인공 할머니는 보통의 삶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모든 게 바로잡혔다면 모든 게 존재했을 두 번째 시간, 할머니의 마음 안에 공존하는 ‘이 시간’과 ‘그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집필한 희곡이 오랫동안 연극으로 만들어지지 못할 때, 언제 공연화될지 모르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시나요?
연극이라는 것이 원체 판이 작지만, 그 안에서도 희곡은 더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희곡을 써도 공연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작가가 희곡 한 편을 쓰는 데 짧게는 1년, 길게는 몇 년이 걸리니까 그 부조화를 어떻게 견딜지 항상 고민해요. 아무래도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크니까요. 제 희곡이 다른 관객, 연출이나 배우를 만나지 못해도 저는 계속 써야 하잖아요. 그래서 당장 관객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 혼자 쓰면서도 괜찮을 이야기를 항상 찾고 있어요.
이를테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 하게 될 작품들의 주제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살면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살면서 너무 궁금했던 문제들을 스스로에게 묻는 거예요. ‘힘들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야’ 하고 말하는 게 글쓰기인 것 같아요. 그게 저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요. 스스로에게 몰두하고 세상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게, 보통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사치스러운 일이거든요. 하지만 그게 제 직업이니까 그런 사치스러운 시간을 잘 만들어서 귀하게 쓰면, 공연이 되지 않더라도 진지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깊이 있게 스스로를 바라본 그 시간은 의미 있을 것 같아요.
<두 번째 시간>을 준비하는 와중에 연극 <기억의 자리>도 10월 중순에 무대에 올라 여러모로 바쁘셨겠어요. 2017년 서울연극센터 유망예술지원사업 <뉴스테이지> 작가로 선정되면서 정식 공연으로 결실을 맺었는데요.
지원할 당시에는 <두 번째 시간>의 공연화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상태였는데, <뉴스테이지>의 경우 선정되면 공연화까지 지원해준다고 해서 떨어져도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2년간 연속 지원이라는 것이 큰 힘이 됐죠. 희곡작가의 경우에는 희곡 2편을 쓰고, 1차 연도에 집필한 작품을 2차 연도에 무대로 올려요. <기억의 자리>는 고고학자의 이야기인데 고려인 이야기도 섞여 있어요.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주인공이 그 상처와 관련된 공간을 고고학이라는 과거로 덮으려 하죠. 사고가 난 탄광에 박물관을 짓는 방식으로요. 주인공은 탄광 안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데,제작비용이 넉넉하지 않아서 무대효과는 암전과 랜턴으로 구성했어요.
극작 외에 극단 활동도 시작하셨다고요.
올해 ‘보편적 극단’을 창단했는데 이제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고 홍보하는 단계예요. 저희들끼리는 <뉴스테이지>에 선정되어 공연한 작품이 창단 작품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함께하는 사람이 2명인데, 모두 특수교육과 연극을 전공했어요. 이전부터 저희 극단 연출과 ‘아주 특별한 예술마을’이라는 이름 아래 장애아를 대상으로 한 연극을 해왔는데, 사실 ‘특별한’이라는 단어가 장애아와 비장애아를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극단 이름도 일부러 ‘보편적 극단’으로 정했죠.
‘보편적 극단’은 어떤 활동을 지향하나요?
그동안 장애인 대상의 공연을 하면서, 저희 공연장에는 언제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인이 소수지만, 저희 극장 안에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수가 항상 비슷했고, 서로 같은 것을 보고 느꼈어요. 밖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던 소수의 사람들이 공연장에서만큼은 보편적인 관객이 되는 거죠. 우리가 지향하는 연극도 그런 거예요. 소수의 이야기가 우리 공연 안에서만큼은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죠. 사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사연이 있든 우린 같은 사람들이잖아요. 보편적 공감대라는 게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우리의 공연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 그 소수의 이야기가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5년 차를 맞이한 작가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작품 잘 보고 있어”라는 말이 신인 작가에게는 큰 힘이 돼요. 연극인 집단은 어느 정도 파편화되어 있어서, 혼자 글을 쓰다 보면 그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거든요.
- 글 고경원 자유기고가
- 사진 백종헌
- 사진 제공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