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정기 화백의 <북한산> 앞에 선 남북 정상. (사진 제공 매일경제신문)
남북정상회담의 숨은 공신이 된 작품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림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어색함을 풀었다. 아름다운 한반도 산하를 담은 화폭은 기념촬영 배경으로도 나무랄 데 없었고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그림이 남북정상회담 성공의 숨은 공신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당시 김 위원장은 평화의집 1층에 들어서자마자 민정기 화백의 청록빛 산수화 <북한산>에 관심을 보이며 “이건 어떤 기법으로 그린 겁니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서양화인데 우리 동양적 기법으로 그린 겁니다”라고 답했다. 정확한 설명이었다. 민 화백이 2007년 그린 <북한산>은 서양 재료인 유화물감을 사용했지만 전통 한국화의 붓놀림과 구도, 채색 등을 활용했다. 가로 452.5cm, 높이 264.5cm에 달하는 대작이다.
남북 정상은 이 그림 앞에서 악수하면서 기념촬영을 했다. 청와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남한 땅을 밟는 북측 최고 지도자를 서울 명산으로 초대한다는 의미로 이 작품을 선택했다. 서울에 있는 산이지만 이름은 ‘북한산’이라는 점도 고려했다고 한다.
조선 진경산수화의 재해석에 몰두해온 민 화백은 장쾌한 북한산 산세를 화폭에 펼쳤다. 지도 제작자에 가까울 정도로 지형 등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동시에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것들을 함께 표현했다. 경기도 양평군에 살고 있는 그는 전문가와 함께 북한산을 두 달 넘게 답사해 그림을 완성했다.
남북 정상은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 걸린 신장식 국민대 교수의 대작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앞에서도 악수를 하면서 기념촬영을 했다.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북한 금강산을 회담장 안으로 들여 이번 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소망했다. 이 작품은 가로 681cm, 세로 181cm에 달하는 푸른빛 화폭에 북한 금강산의 절경을 담았다. 신 교수는 수묵화의 선(線)과 민화의 색채, 현대 풍경화의 감각을 융합해 표현했다. 2001년 직접 금강산에 가서 상팔담을 스케치하고 사진 2,000장을 찍은 후 혼신을 다해 완성한 이 작품을 작업실에 고이 간직해왔다고 한다.
회담장 입구 양쪽에는 이숙자 작가의 <청맥, 노란 유채꽃>과 <보랏빛 엉겅퀴>가 배치됐다. 한반도 보리밭 풍경을 담은 두 작품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
환담장 뒷벽에는 김중만 작가의 훈민정음 작품 <천년의 동행, 그 시작>이 걸렸다. 세종대왕기념관이 소장한 <여초 김응현의 훈민정음>을 재해석한 이 작품은 남북한이 공유하는 한글이라는 소재를 통해 남북이 한민족임을 강조했다. 국민의 평안과 태평성대를 꿈꿨던 세종대왕의 정신을 남북 지도자에게 당부하기 위해 김정숙 여사가 골랐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이 작품을 설명하며 두 정상의 이름 첫 글자 ‘ㅁ’과 ‘ㄱ’을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특별히 표시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웃으면서 “세부에까지 마음을 썼다”고 화답했다.
문 대통령은 환담장 앞에 걸린 박대성 화백의 백두산 장백폭포와 제주 성산일출봉 그림을 가리키며 “왼쪽에는 장백폭포, 오른쪽엔 성산일출봉 그림이 있다”고 소개했다. 또 “북측을 통해 꼭 백두산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도 준비해서 대통령께서 오시면 편히 모실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선에 따라 상징적인 그림 배치
두 정상이 회포를 푼 연회장에는 신태수 작가의<두무진에서 장산곶>을 전시했다. 북한과 마주한 서해 최북단 백령도 두무진과 북한 황해남도 장산곶을 그린 작품이다. 연평해전 등 남북 간 무력 충돌이 벌어진 서해를 ‘평화의 보금자리’로 만들자는 뜻을 담았다.
전반적으로 두 정상의 동선에 따라 회담 장소 분위기에 맞는 그림을 상징적으로 잘 배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이념이 배제된 풍경화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시선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대작으로 회담장을 환하게 만들었다. 또한 회화와 판화, 사진 등 다양한 장르를 골라 다채롭게 연출했다. 마지막 야간 환송행사에서는 평화의집 건물 자체를 스크린으로 삼아 레이저를 쏘는 미4디어 파사드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작가들도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의 배경으로 자신의 작품이 선택된 데 고무됐다. 신장식 교수는 “내 그림 앞에서 두 정상이 악수한 후 한반도의 평화와 희망이 더 커지고 밝은 미래가 왔으면 좋겠다. 앞으로 자유롭게 금강산에 가서 그림을 그리면서 한민족의 기운을 느꼈으면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민정기 화백 역시 “내 그림이 한반도 평화를 선언한 남북정상회담 현장의 한 장면이 되어 화가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며 “남북 화가들의 교류도 활발해져 북한 땅을 자유롭게 밟고 싶다”고 기대했다.
2 신장식 교수의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3 김중만 작가의 <천년의 동행, 그 시작>.
4 신태수 작가의 <두무진에서 장산곶>.
- 글 전지현 매일경제신문 기자
- 사진 제공 청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