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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2월호

뮤지컬 <빅 피쉬>와 <웃는 남자> 판타지 세계로의 초대
뮤지컬은 판타지다. 약 2시간 동안 무대 위 판타지 속으로 관객을 얼마나 빨아들이느냐가 성패를 좌우한다. 뮤지컬 <빅 피쉬>와 <웃는 남자>는 환상적 무대연출과 서정적 넘버로 객석이 원하는 판타지를 충족시킨다. 유명 원작 소설과 영화를 토대로 각색했으며, 유랑극단이라는 환상 공간이 주요 매개가 되는 점도 닮았다. 때로는 너무도 유명한 원작이 타 장르 창작물에 독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은 영리하게 그리고 직관적으로 이를 극복했다. 전자는 낭만적 동화 세계를 노래하고, 후자는 비극적 인물을 통해 따뜻함과 정의를 말한다. 색다른 두 판타지에 흠뻑 빠져보시길.

환상적 동화로 그려낸 웰메이드 ‘사부곡’(思父曲)<빅 피쉬> 2019. 12. 4~2020. 2. 9,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2. 22~2. 23,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뮤지컬 <빅 피쉬>는 주인공 에드워드 블룸의 일대기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환상과 현실이 묘하게 섞여 분간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다. 그래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작품은 긴 서사에 녹아든 ‘부성’(父性)을 노래하며 ‘당신은 어떤 이야기로 남을 것인지’ 객석에 되묻는다.
1막에서는 ‘낭만적인 허풍쟁이’인 주인공 에드워드의 진기한 모험담과 운명적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2막은 그의 아들 윌이 아버지의 모험담 속에 숨겨진 사실과 본격 마주한 뒤 그의 정신적 유산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1998년 미국에서 출간된 대니얼 월리스의 동명 소설과 2003년 팀 버튼 감독의 동명 영화를 각색했다. 2013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다. 국내에서는 최근 좀처럼 보기 힘든 대형 뮤지컬 초연작이기에 더욱 반갑다.
원작과는 큰 틀에서 같은 줄거리를 택했다. 다만, 무대라는 특성상 일부 줄거리만 가볍게 건드렸다. 영화 속에서도 명장면으로 꼽히는 ‘수선화 프러포즈’ 장면, ‘강 회귀’ 장면 등은 화려한 무대연출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묘사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연극적 요소와 현실적인 동화가 만나 원작의 컴퓨터그래픽(CG) 못지않은 황홀함을 준다.
특수의상, 퍼펫, 인형 등을 활용한 점도 특징적이다. 마녀, 거인 칼, 거대 물고기 등 원작의 등장인물을 무대화하기 위해 사용한 요소들에 다소 디테일이 부족해 아쉬움을 표하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동화적 눈’을 가진 관객이라면 이 역시 너그럽게 이해할 수준이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도 돋보인다. 원작을 아직 접하지 못한 관객이라면 현재, 과거, 이야기 안팎을 오가는 설정이 다소 복잡할 수 있으나, 주인공 남경주, 박호산, 손준호를 비롯해 구원영, 김지우, 이창용, 김성철 등 배우들의 내공이 연극적 긴장감을 꾸준히 끌어올리며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줄거리 특성상 무대를 강하게 때리는 넘버는 부족하나, 배우들이 노래하는 화음은 귀를 풍성하게 한다.
잔잔하면서 흥겨운 재즈, 컨트리 송, 팝 넘버가 다양하게 사용됐다. 작품을 본 관객에게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1막 마지막 ‘수선화 프러포즈’ 장면을 들 것이다. 창작진은 이 장면에서 수선화 향기(실제 수선화는 향이 거의 없으나, 귤과 다른 향을 섞어 후각 효과를 조합했다)를 객석 여기저기에 흩뿌리며, 무대 아래를 열어 수선화 밭을 연출했다. 또 무대 위로 수선화 꽃잎을 뿌리는 동시에, 무대 세트를 기울여 만든 거울 효과로 환상성을 극대화했다.
전반적으로 밝은 작품임에도 눈물이 빠지지 않는다. 주인공을 맡은 배우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매번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보이면, 객석에선 많은 이들이 훌쩍이는 소리로 화답한다. 재연이 기다려지는 웰메이드 ‘사부곡’(思父曲)임은 틀림없다.

1 뮤지컬 <빅 피쉬> 공연 모습. (CJ ENM 제공)
2 뮤지컬 <웃는 남자> 공연 모습. (EMK Musical Company 제공)

비극 앞에서도 웃어야 하는, 웃을 수밖에 없는 잔혹 동화 <웃는 남자> 1. 9~3. 1,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상처, 가난, 장애, 인신매매, 고문.” vs “웃음, 치유, 정의, 황홀함, 낭만.” 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반된 느낌의 이 단어들을 동시에 떠올려야 한다. 한 작품 안에 같이 버무리기 힘든 소재임이 분명하다. 하나 양 극단은 통한다 했던가. 잔혹한 운명 같은 작품 안에서 슬픔은 때로 웃음이 되며, 기쁨은 불행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뮤지컬 <웃는 남자>는 이를 한데 엮어낸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에 한 번 경탄하고, 이를 환상적으로 구현한 무대에 또 놀라게 만드는 작품이다. 2018년 초연 당시 국내 창작 뮤지컬 중 이례적으로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각종 시상식에서도 여러 상을 휩쓸며 검증된 수작이다. 지난해 인기를 끈 ‘조커’ 캐릭터도 <웃는 남자>의 주인공 그윈플렌을 모티브로 탄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극에 대한 관심도 더 커졌다.
작품은 동명 소설을 토대로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입이 찢어져 끔찍한 괴물의 얼굴을 하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순수한 그윈플렌이 주인공이다. 인신매매단에 납치돼 입을 찢긴 주인공은 떠돌이 약장수에게 거둬지고, 이들은 유랑극단을 차려 유명세를 탄다. 이석훈, 규현, 박강현, 수호가 그윈플렌을 맡았다. 그의 불운한 여정을 따라가며 정의와 인간성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의 가치를 조명하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한 동명의 프랑스 영화에서도 많은 이미지를 차용해 무대에 녹여냈다.
초연 때와 가장 달라진 포인트는 무대 서사 변화와 넘버의 변주·보강이다. 초연 당시 대작 소설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다소 엉성하게 구성된 서사와 늘어지는 구성으로 지적받았지만 이번엔 한층 견고해졌다. 2막에서는 일부 장면의 순서를 바꿨다. 검투 장면과 대사도 조금씩 손을 대 연기의 디테일을 살렸다. 프롤로그의 선박 난파 장면에서는 실제 배를 새로 제작해 보는 맛을 더했다.
사실 작품을 논할 때 넘버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킬 앤 하이드>, <엑스칼리버>, <드라큘라> 등으로 한국 뮤지컬 팬에게 너무나 익숙한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노래가 극의 서정성을 강화한다. 물론 작품이 달라도 그의 곡들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먹히는’ 멜로디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기존 넘버를 리프라이즈해 주제의식을 강화했으며, 숱하게 반복되거나 불필요한 전주, 간주는 과감히 뺐다.
환상 속에서 쉽게 헤어 나오기 힘든 작품이다. 주제의식을 깊이 파고들자면, 좀처럼 웃기 힘든 작품일 것이다. 그럼에도 판타지 안에 흠뻑 젖는 경험은 큰 짜릿함을 준다. 초연 후 지난해 4월 1,300석 규모의 도쿄 닛세이 극장에서 라이선스 공연을 선보여 해외에서도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글 김기윤_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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