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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2월호

연극과 사물, 물질의 극장 사라지는 빛에 대하여

웹진 [연극in]은 극장의 사물들을 주제로 기획 연재를 진행했습니다. 인간과 함께 연극을 만드는 비인간 행위자인 ‘사물들의 시간’을 쫓아가며 그것들이 만들어지고, 사용되며, 사용가치를 잃어버린 뒤 보관되고 폐기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필자들에게는 ‘동시대의 기후 위기’ ‘창작자의 노동’ ‘사라지는 것으로서의 연극’이라는 세 개의 공통 키워드를 글의 주제로 전달했습니다. 이번 글은 조명디자이너의 시선을 통해 연극의 빛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조명디자이너’가 돼야겠다고 처음 다짐한 순간이 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조소과를 가고 싶었던 나는 ‘조소 대상이 커지면 무대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무대미술과에 들어갔다. ‘무대디자이너’가 되겠다는 포부를 품은 채 두 학기를 보냈고, 그해 첫 번째 겨울방학 때 학교 공연의 조명 오퍼를 하게 됐다. 선배 디자이너가 알려주는 대로 정확한 타이밍에 ‘GO’ 버튼을 눌러 ‘큐’를 진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GO 버튼을 누르는 순간 ‘아, 앞으로 나는 이 일을 하겠구나’ 싶었다. 개강 후 조명 교수님을 찾아가 “저 조명디자인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고,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일을 하고 있다. GO 버튼을 누르면서 내가 경험한 것은 잡히지 않는 무형의 움직임이 눈에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무형의 빛은 늘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그 당시의 나에게는 극장에 앉아 있는 지금이, 내가 무형의 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빛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100번 이상 목격할 수 있다. 이는 무언가의 생생함을 즉각적이고 압축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신기한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극은 이런 신기한 시간의 연속이다. 특정 시공간을 관객과 배우와 무대가 함께 공유한다는 그 유한한 속성으로 인해 현존하는 지금에 더 충실하게 된다. 관객, 배우, 무대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이 시공간은 내일의 시공간과 같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곧 사라질 것이라는 가정은 그만큼 ‘있는 상태’의 가치를 말한다. ‘사라짐’과 ‘있음’은 함께다. 조명디자이너인 나에게 연극과 빛은 같은 속성으로 무대에 존재한다.
극장에서 빛은 ‘의도’를 가진다. 배우를 어떤 모습으로 보이게 하겠다는 의도, 무대를 어떤 분위기로 느끼게 하겠다는 의도, 관객에게 이 장면을 어떻게 보이도록 만들겠다는 의도. 또한 조명기 위치의 의미, 그 색감의 컬러 필터를 씌운 의미, 특정 방향으로 각도를 튼 의미, 100여 개의 조명기가 제 역할을 다하도록 설계한 조명디자이너의 의미가 매달려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이 모든 것을 구현하기 위한 누군가의 노동이 함께 있다. 고개를 들어 조명기를 보고 그 너머의 노동을 생각하는 것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연극하고 있을 누군가와 유대감을 느끼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조명은 공연을 바라보는 ‘시점’을 만들어준다.

공연이 끝난 후 쓰임을 다한 조명기는 천장에서 내려온다.

연극은 한 사람, 하나의 사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집단의 창작이기에 늘 여러 역할의 사람, 사물과 협업한다. 비인간 행위자인 조명기는 무대 위에 있는 무언가를 비추거나, 비추지 않는 역할을 한다. 공연을 바라보는 ‘시점’을 만들어준다. 어딘가를 밝게 비추면 관객은 그곳을 바라보고, 빛이 이동하면 그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빛과 색감의 변화는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정한 색감, 예를 들어 붉은 색감의 빛은 공간의 심리적 온도를 높인다. 깊은 각도로 들어오는 빛은 무대를 노을 지는 야외로 바꾸기도 한다. 조명기라는 사물은 빛이라는 비물질을 만들어 끊임없이 움직인다. 모든 조명기의 빛이 꺼지고 암전이 되면 우리는 다시 조명이 켜질 순간을 고요히 기다린다. 그 순간은 공연의 다음 장면이기도 하며 공연이 끝난 후의 커튼콜이기도 하다. 빛은 다음을 안내한다.
공연이 끝난 후 쓰임을 다한 조명기는 천장에서 내려온다. 다시 극장의 작업등을 켜고 사다리를 펼친다. 그리드에 매달려 열심히 빛을 냈던 조명기는 아직 따뜻하다. 조명기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내려오고, 조명기 앞에 부착된 컬러필터를 떼어낸 후, 처음의 상태처럼 종류별로 정리한다. 빛이 바랜 컬러필터와 퓨즈가 나간 램프, 망가진 전선은 폐기된다. 그렇게 분류된 조명기는 극장의 창고로 들어간다. 차가운 기계가 돼 극장의 사물이 된다.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과 동시에 극장에 있던 공연 팀의 흔적은 지워지기 시작한다. 들어오기 이전의 상태로, 다시 빈 극장으로. 말끔히 비워진 후 작업등을 끄고 극장을 나온다. 잘 빌려 쓰고 나온다.
‘못 쓰게 된 것을 버림’이라는 폐기廢棄의 정의에서 보자면 조명기는 대체로 폐기되지 않는다. 폐기되는 것은 그 쓰임을 다하고 사라진 ‘빛’이다. 바로 그 ‘못 쓰게 된 것을 버림’이란 정의에 빛을 빗대면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으나 연극의 특성, 빛의 속성과 폐기를 나란히 두고 보면 ‘사라짐’이란 당연하다. 연극의 사물인 조명기는 극장 창고에서 다음 공연을 기다리고 있고 때가 되면 다시 빛을 내 무대를 밝힌다. 연극이 끝난 후의 암전과 같은 것.

글·사진 김지우_공연예술종사자이며 조명디자인, 시노그라피Scenography를 비롯한 다양한 포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woojeegim@gmail.com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됐습니다. 원문은 웹진 [연극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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