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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무용가 김주원 멈춰 있지 않고 흐르는 삶과 춤 속에서 유영하는 발레리나

발레리나 김주원의 삶은 한 단어로 축약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대표 발레리나’ ‘독보적 행보를 보여온 예술가’ ‘예술가들의 뮤즈’ 등.
1998년 국립발레단 〈해적〉으로 데뷔한 이후, 그는 자신의 역할을 ‘발레리나’라는 하나의 틀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국립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를 거쳐 무용으로 자신의 무대를 꾸준히 올리는 예술감독으로,
후배 발레리나를 양성하는 스승으로 부단히 삶의 스테이지를 능수능란하게 옮겨갔다.
때로는 국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친근한 모습을 보이거나 뮤지컬에 도전하는 등 대중 스타로 거듭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체 그를 계속 도전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올해로 데뷔 25주년을 맞은 발레리나 김주원과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관객들의 박수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공연계를 덮친 코로나19의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고 관객과 만날 기회가 점차 생겨난 2022년, 그는 두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지난 6월에는 데뷔 25주년을 맞이해 자신의 무용 여정에 함께해 준 모든 이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레베랑스Reverence〉를 공연했다. ‘레베랑스’는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발레의 인사 동작을 뜻한다.
25년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대에 올라 ‘레베랑스’를 했지만 그는 그 모든 순간을 만들어준 관객에게 감사할 줄 아는 무용가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대에서 인사하는 순간이 정말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져요. 인사할 때마다 함께하는 ‘관객의 박수’가 저를 깊이 있고 좋은 예술가로 만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1998년 데뷔 이후 15년 동안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활약하며 명실상부 ‘국내 정상의 무용가’ 자리를 고수했다. 2006년에는 발레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며 무용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수상했다. 2011년에 그는 국립발레단에 소속돼 전국을 누비며 〈지젤〉을 150회가량 공연했는데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했을 정도로 ‘발레 붐’을 일으킨 주역이다. 2012년 국립발레단 퇴단 후에는 동양인 발레리나 최초로 전설적인 발레 〈마그리트와 아르망Marguerite and Armand〉을 들고 돌아왔다.
2019년에는 ‘탱고발레’를 선보였다. 토슈즈 대신 하이힐을, 고즈넉한 클래식 음악 대신 정열적인 탱고 음악에 몸을 맡겼다. 초연 당시 전 회차(7회) 매진 기록을 남긴 김주원의 탱고발레 〈3 minutes : su tiempo 그녀의 시간〉은 3년 만에 새로운 대본과 연출로 지난 10월 8일부터 15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다시 한번 관객과 만났고, 더욱 완성도 있는 공연으로 매 공연 매진을 기록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을 무척 사랑했어요. 탱고음악 안에서 인생을 느끼고 많은 위로를 받았죠. 공연명인 ‘3 minutes’는 탱고를 추는 두 파트너의 시간을 의미하는데요. 밀롱가(탱고를 즐기는 장소)를 찾은 한 여자의 사랑과 이별의 시간을 열정적인 탱고 음악, 발레, 노래로 표현한 작품이에요. 이 서사를 담아내는 탱고를 라이브밴드의 연주와 함께하는데요. 전통적 발레와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강렬한 탱고가 만나 시각과 청각의 다채로운 공감각적 심상을 자아내죠. 궁극적으로 관객 여러분께 치유의 시간을 안겨주길 바랐고요.”
이 무대에서 그는 탱고 음악으로 춤을 추는 시간인 ‘3분’ 동안 만남, 사랑, 이별의 서사를 담아내는 완전한 교감의 탱고를 춘다. 김주원은 예술감독을 겸했고,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가 음악감독을 맡아 정열적이고 섬세한 춤과 음악을 선보였다.
“운이 좋게도 저는 코로나19 기간에 무사히 공연을 올릴 기회가 있었어요.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공연 관객 수 제한으로) 객석을 모두 열 수는 없었죠. 그동안 객석을 가득 메워주시던 관객분과 함께했던 소중한 무대가 그리웠습니다. 오랜만에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을 보니 가슴이 벅차고 행복했습니다.”

365일 하루 10시간씩 연습하는 마음

여전히 많은 이에게 발레는 엄숙하고 고상하고 약간은 어렵게 느껴지는 순수 예술 장르다. 국립발레단을 떠난 이후 예술감독 역을 자청한 데에는 발레를 조금 더 친숙하게 대중에게 알림으로써 그 저변을 넓혀나가려는 마음도 있으리라. 그는 〈레베랑스〉 〈사군자〉 〈디어 루나〉 〈탱고발레〉 등 자신이 연출한 작품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으며 발레를 대중화하려는 노력을 상기하면서도, 다시 ‘클래식’의 중요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셰익스피어가 나오는 시대가 아닙니다. 호숫가에 흘러가는 물, 하늘을 향해 뿌리내린 나무, 백조를 보고 시를 쓰는 시대가 아니죠. 세상이 각박해지고 호흡이 빨라져서인지 러닝타임이 4시간에 이르는 대작은 많이 보기 힘들어합니다. 대중은 이제 인터미션 없는 1시간 20분짜리 공연을 좋아하죠. 하지만 저는 그럴수록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어내는 것의 귀중함을 알려주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무대에 서는 시간을 위해 1년 365일 쉬지 않고 하루 10시간씩 연습을 하죠.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의 가치를 많은 분이 알아주길 바라요. 클래식을 귀하게 대접하는 사회가 클래식을 뛰어넘는 혁신도 할 수 있죠.”
탱고, 한국무용, 뮤지컬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관객을 만나고 강단에 서서 후배를 양성하며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는 데는 결국 ‘발레’라는 뿌리가 그의 삶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77년생, 만 45세 현역 발레리나’라는 수식어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무대 뒤에서 누구보다 치열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발레라는 예술 자체가 자신의 컨디션과 멘털을 철저히 관리하는 장르다 보니 무용가들은 자기 관리가 삶에 녹아 있는 듯해요. 오랫동안 발레리나의 삶을 살아오며 몸에 밴 습관이 여러 장르를 만나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가 말하는 ‘발레리나의 삶’이란 무엇일까? 김주원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일과 시작이 오전 5시라면 2시간 앞선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는 식이다. 그는 매일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 누워 허벅지 안쪽 근육의 근력운동을 30분 하고 복근을 강화하는 플랭크 운동이나 균형감각을 잡는 운동, 스쾃, 발레 바bar 스트레칭 등을 연이어 한다. 이 같은 삶을 유지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오랜 시간 춤을 추면서 크고 작은 부상이 있었어요. 이제는 약해진 근육을 보강하고 아픈 몸을 관리해야만 토슈즈를 신고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매일 운동하게 하는 것 같아요.”
‘춤을 다시는 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급습한 적이 있다. 2017년 허리 디스크가 터져 병원에서 춤을 포기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다. 그러나 그는 무작정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2022년 현재, 여전히 현역의 삶을 살고 있다.
“(춤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침착해졌던 것 같아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치료와 재활에 임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춤을 출 수 없다면, 후회 없이 무대를 떠나야 하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기적처럼 춤을 추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영원한 발레리나’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과분하지 않은 그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어떤 삶을 살까? 평생 자기 관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분투와 고민, 어려움이 계속되는 삶을 반복할까? “몸을 쓰지 않는 직업을 가진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다음 생에도 춤을,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 같아요.”

멈춰 있지 않고 잘 흘러가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

발레는 흐르는 듯한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춤이다. 동작과 동작 사이 구분이나 단절을 찾기 어렵다. 섬세하고 정교한 연결에서 그 춤을 추는 무용수의 진심과 힘이 담긴다. ‘흐름과 연결’. 김주원의 삶과 춤을 관통하는 철학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포즈에서 저 포즈로 가는 과정,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 분야를 넘나들며 확장해 가는 일…. 이 모든 것에서 연결이 섬세하고, 성의 있고, 진심이 담기고, 정교할수록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저는 무대와 춤, 발레가 곧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는 멋진 척 폼을 잡으며 한 말이었죠. 하지만 언제까지 춤출 수 있을지 모르는 지금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이따금 그의 연결은 경계를 넘나든다. 장르와 매체의 구분이 없이, 그리고 세간의 편견과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에게 가장 파격으로 다가왔던 일은 국립발레단에 소속돼 있던 시절인 2007년, 패션잡지 《보그》 한국판 10월호에 상반신 누드사진이 실렸던 일일 것이다. 이 사진은 사진작가 김용호의 사진전 〈몸〉에서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끝내 걸리지 못했다. 이 일로 국립발레단은 “물의를 일으켰다”라며 1개월 감봉 처분을 내렸고, 국내 언론은 ‘파문’ ‘논란’ 같은 단어로 김주원의 시도를 왜곡했다. 발레리나는 모름지기 어떠해야 한다는 보수적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여성 예술가의 행위를 기성의 틀에 맞춰 해석하고 비판하려는 시도였으리라. 그러나 오히려 25년간 꾸준히 춤을 추고 있는 김주원의 무대 인생 자체가 그 같은 과거의 편협한 평가를 우아하고 고상하게 반박한다.
“저는 제 언어도 중요하고 누군가의 언어가 되는 것도 중요해요. 20대 때는 클래식 발레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사는 독선적인 아이였어요. 그러다 목마름을 느껴 다른 장르의 예술가와 협업을 시작했죠. 그게 생명 연장의 비결이었어요. 다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를 온전히 제물로 던집니다. 그래야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었다 들어왔다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매 도전이 좋은 춤을 추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새로운 언어와 영감이 제겐 좋은 자양분이었죠.”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밀도 있게, 마라토너처럼 꾸준하게 춤을 추고 있는 그녀는 지금 현재 자신의 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아직 저의 춤은 완성되지 못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저에게 발레는 곧 리허설이라 말하고 싶어요.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까지 연습이고, (지금 서 있는) 무대조차 다음 무대를 위한 리허설이죠. 어릴 때는 춤을 통해 삶을 배웠다면, 시간이 흐르면서는 어느 순간 삶이 춤에 녹아들고 있음을 느껴요. 지금의 제 춤에는 온몸과 마음으로 무대와 관객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싶은’ 김주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 춤은 완성되지 못했고, 여전히 많은 것에 설레고 심장이 뜨거워집니다. 또 다른 무대,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춤을 향해 계속 달리고 있어요.”
모든 무용가는 언젠가는 토슈즈를 벗게 된다. 우리나라 나이 50세에 발레리나 강수진은 무대를 떠났는데 이는 무척 예외적인 일이었다. 발레의 고난도 테크닉은 신체 기능에 큰 영향을 받는지라 무용가는 이르면 30대부터 은퇴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못해도 40세 안팎에 은퇴를 하게 되고 ‘발레단 퇴단은 은퇴’가 불문율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국립발레단 퇴단 이후에도 프리랜서 무용가로 계속 춤을 추고 스스로의 무대를 만들어가는 김주원은 훗날 자신의 ‘은퇴’를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하고 있을까? 막연히 상상해 본 은퇴 장면이 있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 대신 어떤 수식어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는 명확한 언어로 주저 없이 말했다. “멈춰 있지 않고 잘 흘러가는 예술가, 김주원.

[문화+서울] 편집부 | 사진 제공 세종문화회관, EMK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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