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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2월호

한영숙과 성금연 지음知音으로서 함께했던 두 여자

“아니, 여기서 어떻게 춤을 추라고?” 한영숙 명무名舞는 투덜거렸다. 1984년 2월 27일, 원서동 공간사랑에는 개관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모였다. 소극장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급기야 무대에까지 관객이 앉았다. 하와이에 거주하던 인간문화재 성금연의 귀국 공연이었다. 성금연의 가야금과 한영숙의 춤이 어울리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었다. 한영숙 명무와 성금연 명인이 오랜만에 만난 이 무대는 20세기 국악 공연사의 아름다운 한 페이지였다. 한영숙과 성금연은 평생 친자매 이상으로 돈독했다. 일찍이 부모의 정과 형제의 연을 모르고 자란 한영숙에게 성금연은 보듬어주고 싶은 여동생이었다.

춤과 가야금의 세계에서 각각 빛나던 두 별

한영숙1920~1989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를 보다 못한 조부 한성준1875~1941은 열 살을 넘긴 한영숙에게 춤을 가르치고자 서울로 불렀다. 그곳이 바로 조선음악무용연구회(경운동 47)였다. 1938년 경성에서는 ‘조선특산품전람회’가 열렸는데 이때 ‘전조선향토연예대회’라는 큰 축제도 함께 열렸다.
광화문 앞 특설 야외무대와 부민관에서 공연이 밤낮 이어졌다. 1938년 5월 2일, 조선음악무용연구소가 부민관에서 공연했다. 당시 한성준의 제자 중에는 이강선과 장홍심이 유명했다. 한영숙은 두 사람과 3인무 살풀이춤을 췄다. 1940년 2월 27일, 경성 부민관에서열린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도동渡東 공연에 한영숙은 주역 무용수로 참여했다.
한영숙이 춤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할 때 성금연1923~1986은 가야금을 잘 탄다는 인정을 받았다. 1939년 5월 13일, ‘조선음악콩쿨대회’가 열렸다. 조선에서 선발된 17명이 최종 경합을 벌였다. 14명이 판소리, 2명이 북춤鼓舞으로 참여했는데 성금연은 유일하게 가야금으로 참여했다.
1940년 7월 11일, 일본 공연의 부푼 꿈을 안고 한영숙 일행은 경성역에서 출발했다. 일본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한영숙은 도쿄의 히비야공회당에서 승무를 췄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큰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이즈음 한성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점차 몸의 거동이 불편하게 된 한성준은 이듬해인 1941년 6월 타계한다.
한영숙은 다시 인생의 어려움을 경험한다. 당시 일제는 전쟁에 혈안이 된 때였다. 예술인도 조직을 만들어 위문 공연을 하면서 떠돌던 시기였다. ‘목포의 눈물’(1935) 작곡가 손목인1913~1999이 이끄는 단체에 한영숙은 무용수로 합류했다. 조부를 여의고 자신이 원하는 예술적 춤을 추지 못하던 시기였다.

따뜻한 춤과 음악, 혹독한 삶에 대한 위로

한성준이 이끄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는 지영희1909~1980가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가 많았으나 집안의 강권에 못 이기고 성금연은 지영희와 만나 혼인한다. 이는 남도음악만을 하던 성금연이 경기음악과 충청음악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 마음 내키지 않은 결합이었지만 성금연은 지영희를 통해 음악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지영희의 협조로 가야금 최고의 실력자가 된 성금연은 1950년대 이후 ‘성금연의 가야금 시대’를 열게 된다.
한편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한영숙은 모든 과거를 잊고 조선무용건설본부의 공연 〈해방의 무용〉에 참여한다. 1945년 11월 6일과 7일, 이틀간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렸다. 이때 한영숙은 한성준 춤의 맥을 잇고자 하는 의지로 다시금 활활 타올랐다. 당시 한영숙에게 큰 힘이 된 것이 지영희와 성금연 부부였다. 지영희는 조부 한성준의 제자였다.
이들은 여러 공연에서 함께 무대를 만들어갔다. 그러다가 1960년 국악예술학교가 생기면서 똘똘 뭉치게 된다. 성금연에게는 ‘새가락별곡’ ‘춘몽’ ‘향수’ 등의 가야금곡이 있었는데, 이 곡은 모두 한영숙 춤의 반주 음악이기도 했다.
1966년 9월 3일과 4일, 한영숙의 무용 생활 35주년을 결산하는 발표회에 성금연의 가야금이 함께했다. 1967년 10월 25일, 성금연 첫 번째 독주회에는 한영숙이 특별 출연했다. 이 공연은 모두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렸다. 지난 20세기의 주요한 전통예술 공연으로서 의미가 깊었다.
두 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해는 1969년이다. 모두 인간문화재(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됐다. 1월에는 성금연이 가야금산조(당시 23호)로, 7월에는 한영숙이 승무(당시 27호)로 지정을 받았다. 이듬해 1970년에 한영숙은 또 학무(당시 40호)로 지정을 받았다. 1971년 6월 7일과 8일, ‘법열곡’이란 이름으로 ‘한영숙무용발표회’가 열렸다. 성금연은 든든한 지원군으로 무대를 빛냈다.
한성준에게서 이어진 한영숙의 춤, 그리고 지영희와 성금연의 음악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경기음악’이었다. 경기음악의 상징적 존재이던 지영희와 성금연은 안타깝게도 1974년 하와이로 이주했다. 모두 인간문화재를 반납하고 떠났다. 1977년 6월 24일, 제자들로 구성된 민속악회 시나위의 초청 형식으로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지영희·성금연 부부 초청 연주회’가 열렸다.
한영숙은 늘 성금연을 생각했지만 1970년대 초반 이후 만날 수 없었다. 그저 마음으로만 서로 그리워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십수 년이 지난 1984년에 만났으니 서로 얼마나 반가웠을까! 지음知音은 진정 두 사람을 두고 해야 할 말이다. 성금연은 1986년 한 차례 고국을 더 방문했고, 같은 해 이국땅 하와이에서 타계했다. 한영숙은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 공연 〈떠나가는 배〉에서 살풀이춤을 췄고 이듬해 인 1989년 타계했다.
화려한 무대와는 별개로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두 사람은 매우 혹독하고 버거운 삶을 살았다. 두 사람의 음악과 춤을 보면 언제나 봄날같이 따스하다. 힘겨울 때마다 여성으로서, 또한 동시대 음악가로서 서로를 다독여준 두 사람. 한영숙의 춤에는 성금연의 가야금, 성금연의 가야금에는 한영숙의 춤. 21세기에 아름답게 기억할 20세기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이다.

윤중강_국악 평론가 | 사진 제공 윤중강

1960년대 어느 봄날, 한영숙과 성금연(오른쪽)

성금연의 가야금 연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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