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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2월호

살 같은 말

〈쓰다〉 59호 포스터

출판사 봄날의 책에서 펴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2020)의 엮은이이자 공동 저자인 메이는 책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 “아플 때를 비롯해 고통의 시기에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중요한지, 그런 시기를 지나보거나 지켜본 적이 있는 이들은 모두 안다. 그럴 땐 말과 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말은 거의 살이며, 말은 살리고 죽이는 자신의 잠재력을 전부 현시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아프거나 늙어가는 사람들, 혹은 아픈 몸으로 늙어가는 사람들 곁을 지키는 돌봄노동자의 삶을, 정말이지 그들의 살을 떼어오기라도 한 듯 각자의 언어로 우리 눈앞에 그려낸다. 이처럼 돌봄노동자의 시간이 저 ‘살 같은 말’을 통해 현시될 때, 독자는 돌봄노동을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로 받아들일 기회를 얻는다.
평화롭지 않은 중년 이후의 삶을 상상해 보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수록 우리가 질병에 취약한 노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기간도 함께 늘어나기 때문이다. 장애와 돌봄노동에 관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가상의 경험은 미래의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웹진 [비유] 11월호는 소설 특집으로 꾸려졌다. 그 가운데 임이송 작가의 소설을 소개하려 한다. 돌봄노동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나는 빵집에 갈 때나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나 엄마를 데리고 병원을 오갈 때에도 수선집에서 일하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그곳에 박혀 있는 정물 같다.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바느질에 몰두하고 있다. 내가 흐르지 않는 시간에 파묻혀 있을 때에도 그녀의 손놀림은 바쁘다.
그녀는 첫 번째 항암 치료를 하고 이틀 만에 나왔고, 그다음에는 사흘 만에 나왔고, 세 번째도 사흘 만에 나왔기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었다. 5년간 그녀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임이송, 〈효재와 근숙〉 중

소설은 치매 환자인 엄마를 돌보는 효재와 수선집을 운영하는 근숙이라는, 50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두 여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효재는 두 언니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자신에게 좀처럼 정을 주지 않았던 어머니를 돌본다. 그런 효재는 삶의 열정을 다 소진한 사람 같다. 언니들이 간병을 맡는 일요일마다 시간을 어찌 써야 할지 모를 만큼 그는 자기 욕망에 관해 무능하다. 그래서 효재는 집 밖으로 나가 관성적으로 옷가게에 들러 별 필요도 없는 옷을 산다. 그렇게 옷가지를 들고 그가 매주 향하는 곳이 근숙의 수선집이다.
근숙은 장성한 쌍둥이 아들을 군에 보내고 혼자 지낸다. 그는 효재가 사는 아파트에 입주하는 것이 꿈이기에 열심히 일만 하며 살아왔지만 얻은 것은 결국 병뿐이다. 근숙은 효재가 매번 새 옷을 들고 수선집에 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효재의 우울한 표정과 분위기에 끌려 서서히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
가족 구성도, 경제적 배경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궁금해한다. 효재는 자기 일에 바쁘게 손을 놀리는 근숙을 부러워하고, 근숙은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여유롭게 거니는 듯한 효재를 부러워한다.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오해한 것이다. 아픈 근숙이 치료를 위해 수선집을 오래 비웠다가 돌아오고 나서야 그들 사이에 “개인적인 이야기”가 오고 간다. 아픈 노인을 돌보는 사람과 아픈 자신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의 대화는 조심스럽다. 상대방의 삶을 함부로 건너다보지 않는다. 서로 사정을 명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상대를 위로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이는 섣부른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다. 고통의 공동체로서, 효재와 근숙은 자신의 고통을 거울 삼아 서로의 고통을 ‘살 같은 말’로 보듬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들여다보는 고통은 타자의 것인 동시에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웹진 [비유] 12월호는 비평 특집으로 꾸려진다. ‘돌봄, 노동, 환경’을 주제로 여덟 편의 글이 실린다. 이 글들이 특히 돌봄노동과 그것이 초래하는 인간의 고통에 관한 진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고 있다.

김잔디_[비유]편집자 | 사진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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