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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2월호

정형민 감독의 〈카일라스 가는 길〉 나이는 수치羞恥가 아니라 수치數値

〈카일라스 가는 길〉(2020)

감독 정형민
출연 이춘숙, 정형민

어떤 여행은 길이 끝난 것 같은 순간에 시작된다. 꾹꾹 눌러쓴 글씨처럼 길 위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기억이라는 것이 모여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 인생이 된다. 삶의 기록이, 뭉친 덩어리가 퍼즐처럼 맞춰지는 순간 길은 마음을 그리는 지도가 된다. 그런데 자연은 때로는 내 마음과 다르다. 마음에 다 품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자연의 풍광은 울컥할 만큼 아름답지만 그 태도가 무심하다.

마음의 길을 따라 걷다

일종의 로드 무비이자 다큐멘터리 영화인 〈카일라스 가는 길〉은 촬영 당시 여든네 살을 맞이한 이춘숙 할머니가 떠난 카일라스 순례길로 관객을 이끈다. 카메라는 할머니의 마음만큼 넉넉한 자연, 그리고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의 대화가 가능한 오지의 사람들을 매 순간 마주한다. 영화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인생의 순간에도 ‘포기’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고 바람처럼 속삭인다. 길을 따라 걷지만 카메라가 향하는 시선은 물기 없이 살아온 한 여인의 마음이다. 광활하고 거친 자연은 한 여인이 살아온 길 자체가 돼 마치 걸음걸음 마음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춘숙 할머니는 아들, 그리고 자연의 시선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는 듯한 카메라와 함께 바이칼호수, 몽골대초원, 고비사막, 알타이산맥, 타클라마칸사막, 파미르고원, 그리고 대장정의 끝인 티베트 카일라스산까지 우리가 익히 들어봤지만 감히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곳을 걷는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어느새 훌쩍 들어버린 나이는 그 시간만큼 그들을 아프게 한다. 한번 길을 잃은 걸음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잊게 만든다. 그래서 어쩌면 부지런히 걸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 같은 삶의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서야 하는 순간을 만난다.

아주 사적인 이야기의 위안

과거에 대한 회상보다는 길을 걷는 현재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가 삶에 더 가깝다는 사실은 영화가 주는 선한 메시지이자 주제이기도 하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는 이춘숙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삶에 대한 후회보다는 그리움의 감각이 훨씬 더 크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남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할머니의 순수한 마음이 대자연과 만날 때, 할머니 역시 하나의 거대하고 찬란한 자연처럼 보인다.
우리는 종종 나이를 수치羞恥라고 여기는 순간을 만난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뒤떨어지는 것, 소멸되는 것이라고 무시하곤 한다. 그 이유는 주변에 삶의 무게를 제대로 겪고 일러준 넉넉한 원로 대신, 어린 삶을 꾸짖고 질책하는 데 익숙한 꼰대가 더 많아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춘숙 할머니를 보고 있자면 나이라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그저 수치數値일 뿐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빙판과 눈밭을 헤쳐나가는 동안 우리는 그저 ‘살아 있어서 아름다운 이춘숙’이라는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카일라스 가는 길〉의 미덕은 드라마틱한 연출을 위해 카메라를 왜곡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할머니의 거친 손을 동정하거나 여기저기 아픈 그녀의 몸을 과장하지도 않고 꾸며보려는 욕심이 없어 할머니의 삶을 더 멀리서 묵도할 수 있게 된다.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는 대자연은 늘 어떻게 변할지 몰라 두려웠던 할머니의 인생, 혹은 우리의 인생과 꼭 닮았다.
거친 길을 걷다 보면 찬란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그래서 그 볕을, 그 곁을 다시 느끼고 싶어 다음 걸음을 걷게 된다. 쉬어가는 매 순간은 축복이다. 어쩌면 내 삶에도 그런 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볕이라는 것이 내가 걷는 길 속에 있다는 사실을 집으로 돌아오는, 물기 없는 아스팔트 길 위에서도 느껴본다. 그게 참 위안이 된다.

최재훈_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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