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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책 《다정한 서술자》와 《배삼식 희곡집》 연말을 나기 위한 지혜와 다정함

길거리에 낙엽이 쌓이고 그 사이로 붕어빵 노점상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면 월동 준비를 할 때가 됐다는 뜻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마음의 매듭을 짓고, 어떤 것들은 기꺼이 내려놓는다. 그렇게 비워진 자리 속에 비로소 찾아드는 지혜가 있다. 아래의 책은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았을 때 새롭게 다가오는 다른 존재들에 대해 말한다. 크리스마스트리 가장 꼭대기에 달린 별이 되는 대신, 나란히 달린 수많은 전구 중 하나가 되는 다정한 반짝임에 대해.
가장 겸손한 사랑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면 《다정한 서술자》 | 올가 토카르추크 | 민음사

조각난 세상에서 어떻게 진실을 손에 쥘 것인가. 난립하는 뉴스와 SNS 정보 사이에서 넘쳐흐르는 목소리와 파장을 잘 따라가다가도,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 같은 불안과 현기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듯하다. 온갖 정보가 쏟아지고 개개인의 감정과 의견 표출이 늘어날수록 지혜와 통찰력, 승화된 감정은 더 귀해져 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첫 에세이집은 흔들리는 걸음 곁에 잠시 붙들 만한 밧줄이 돼준다.
표제작이자 노벨문학상 기조 강연문인 〈다정한 서술자〉는 우리 시대가 ‘픽션에 대한 피로감’에 빠졌다는 진단을 내린다. 대립하는 이야기와 방대한 정보 속에서 많은 이가 복잡성과 모호성을 거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며 해석과 이해를 거쳐야만 비로소 경험으로 탈바꿈할 수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다정한 서술자’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말하는 다정함이란, 가장 겸손한 사랑의 유형이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다른 존재를 면밀하고 주의 깊게 바라볼 때, 등장인물의 다양한 시각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개별적 시각의 지평을 넘어서는 사인칭의 다정한 서술자가 탄생한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콘텐츠의 본문보다 그 아래 달린 댓글에서 더 많은 통찰과 감흥을 발견하고 있다면, 세계의 고통에서 인간의 고통보다 다른 동물의 고통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면, 괴상한 것들을 아름다운 것으로 존중하며 다시 볼 수 있다면, 당신 역시 다정한 서술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셈이다. 다정한 서술자만이 조각이나 파편을 소중하게 그러모아 별자리를 만들 줄 안다. 인간이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조각일 뿐이라는 것, 이 지극히 겸손한 자각이 세상에 더 많은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 기술할 수 있는 능력이자 축복이 된다. 이 놀라운 변환이 이 에세이집 안에 있다.

지구에서 하나의 종이 사라지는 일의 무게 《배삼식 희곡집》 | 배삼식 | 민음사

지난해에는 유년 시절 이후 처음으로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해 봤다. 마음의 반짝임이 줄어든 자리를 다른 빛들로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 저녁 늦게 캄캄한 집에 들어설 때면 그 빛들이 꽤 위안이 됐다. 나에게 크리스마스트리가 지닌 의미를 가장 구체적 실감으로 알려준 작품은 배삼식의 〈하얀 앵두〉다. 이 희곡 속에는 한 인물이 나무와 꽃을 기가 막히게 잘 키워내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잠시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할아버지는 가을꽃이 다 지고 이듬해 꽃대가 올라오기 전의 시간 동안 자식들이 사다준 사탕의 껍질들을 모아놨다가 꽃을 접어 나뭇가지에 매달아두는 사람이었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머리에 불이 켜지듯 크리스마스트리가 떠올랐다. 겨울은 무언가가 사라진 후의 계절이지만, 그 빈자리는 소중한 것들이 남긴 사소한 흔적들로 채워질 수 있다. 자식들이 준 사탕의 껍질도 버리지 못하는 마음에 스며든 빛 같은 것들로.
오랜만에 다시 펼친 《배삼식 희곡집》에서 새로 들어온 작품은 의외로 〈벌〉(2011년 명동예술극장 초연)이었다. 초연 당시는 기후 위기라는 말이 적극적으로 거론되기 한참 전이었으나 ‘벌집군집붕괴현상CCD, Colony Collapse Disorder➊’ 에 주목해 작은 시골을 배경으로 펼쳐내는 이야기다. 극이 시작되자 사라졌던 벌떼가 어디선가 몰려와 놀랍게도 말기 암 환자 온가희의 몸에 내려앉는다. 죽어가는 그녀의 몸은 여왕벌을 품은 듯 잠시 생명력과 사랑의 기운으로 넘치지만 며칠이 지나 저물어가는 황혼녘에 벌들을 떠나보내며 세상의 이치와 숙명을 받아들인다. 그 깨달음은 인간의 죽음을 세상의 절대적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노력과 연결돼 있다. 암을 두고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기적’으로 받아들인 온가희는 자신의 몸을 벌들이 ‘잠깐 편안하게 쉬어 갈 나무둥치’로 내어줄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지구에서 하나의 종이 사라지는 일의 무게가 인간이 맞이하는 죽음의 무게와 다르지 않으며, 죽음이 다른 생명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적 죄’를 인간의 원죄에 포함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인간 역시 세상에 빚진 생명체임을 기억하라는 말로 받아들인다. 태어나서 흙을 밟고 햇볕을 쬐며 살아갈 때 나는 식물이고, 통증을 느끼며 웅크려 있거나 무언가를 집어삼킬 때 나는 동물이다. 스스로 식물이고 동물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흐리멍텅함을 넘어서기 위해, 좀 더 나은 인간이 돼 다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이런 ‘다정한 서술자’들에 기대어 연말을 난다.

강지희_문학 평론가, 평론집 《파토스의 그림자》 저자 | 사진 제공 민음사

2006년부터 미국과 유럽 등에서 보고되던 벌집군집붕괴현상은 꿀벌이 단체로 실종되는 상황을 뜻한다.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 사이 한국에서도 약 78억 마리의 벌이 자취를 감췄다. 벌집군집붕괴현상의 원인으로는 지구온난화, 서식지 감소, 병해충, 농약, 외래종 침입 등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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