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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소설가 김연수 매일 달리는 작가, 이야기를 짓는 작가

--- “세상의 일을 이해하는 건 이유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

태풍이 지나간 고요한 일산 호수공원에 김연수가 서 있었다.
간밤에는 도시를 날려버릴 듯 거센 바람이 불었지만 거짓말처럼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과 가을에 각각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은 소설가는 이제 숨을 고르고 있다.
이번 가을은 이 소설가에게 특별한 계절로 기억될 것이다. 49쇄를 찍고 18년 만에 개정판으로 돌아온 김연수의 가장 사랑받는
에세이 《청춘의 문장들》, 그리고 9년 만에 묶은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연이어 나왔다.
1993년 시로 등단한 이후 20여 권의 책을 내며 읽고 쓰는 삶을 살아온 그에게는 잠시나마 쉼표 같던 지난 3년이었다.
호수공원 인근 카페에서 두 권의 책과 그간의 시간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그에게 손으로 글을 쓰는 노동과 다리의 힘으로 달리는 일은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았다.
다시 달리게 된 것, 그리고 쉬지 않고 글을 쓰게 된 것. 두 가지 루틴이 코로나19 시대를 견디게 한 원동력이었다.
코로나19 시대를 이기게 한 힘

전염병의 시대는 소설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물었다. 특히나 동시대의 아픔에 대해 예민하게 기록해 온 김연수라면 더욱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시대가 시작되고 적응이 잘 안돼서 글을 많이 쓰지 못했어요. 생활도 좀 틀어진 느낌이었고요. 이 또한 코로나19 때문일 텐데, 한 1년쯤 지나고 나니 뭘 막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쓰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글을 굉장히 많이 쓰는 편이에요. 되게 묘하게 같이 가는 게, 달리기도 열심히 하게 됐어요. 그리고 관심사가 점점 줄어들어서 예전에 비해 답답하다거나 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이런 욕망은 거의 없어졌어요.”
여행에 대한 욕심이 사라졌다지만 요즘의 그를 즐겁게 떠나게 만드는 소소한 여행은 존재했다. 바로 전국의 도서관을 찾아가는 ‘도서관 기행’. 도서관 사서들이 만드는 웹진에 청탁을 받고 그는 지방 시립도서관 탐방기를 한 달에 한 번 쓰고 있다. 항상 작가로서 초대받다가 지나가는 여행자로 도서관을 찾으니 새로운 것이 보였다.
“이 소소한 여행은 책의 발견에 가깝더라고요. 흥미가 생겼어요. 지방 도시를 찾아가는 것, 그리고 도시마다 도서관이 있다는 것, 거기 가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책에 대한 접근성도 좋아졌고, 바닷가에 있는 도서관, 숲속에 있는 도서관 등 정말 좋은 곳이 많았어요. 여행의 갈증을 도서관을 통해 해갈하게 됐습니다.”

전염병의 시대에 그는 슬럼프를 극복할 힘도 얻게 됐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한 2020년에 그는 50세가 됐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세계적 변화와 맞물리자 그는 큰 심적 변화를 겪었다.
“이제 그 이전으로는 못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결국에는 이렇게 세상이 안 좋아지게 되고 세상이 망할 것 같구나 싶었지요. 코로나19도 기후 위기에서 비롯됐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우울하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사라질 존재이니까. 자연법칙으로 이렇게 마구 쓰면 안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은 학교 다닐 때 다 배웠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든 그의 주변 친구들은 어떻게든 그 시간을 통과했다. 집을 짓기도 하고,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때 친구들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뭘 하는 사람이냐고. 뭘 해서 사람들한테 세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냐고.
“저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더라고요. 세상에는 좋은 이야기도 있고, 나쁜 이야기도 있어요. ‘세상은 완전 망할 거고 나쁜 놈들만 가득해’ 이런 이야기도 있고, ‘아니야, 노력하면 바꿀 수 있을 거야’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이야기 공급자로서 세상에 뭔가를 남긴다면 조금이나마 좋은 이야기를 공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조금이라도 좋은 이야기는 우리가 미래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겠구나, 나도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겠구나.’ 그런 변화가 생겼어요.”

때마침 코로나19 시기에 읽게 된 책도 《신 없는 세계에서 목적 찾기》였다. 무신론자의 태도와 과학자의 태도는 닮아 있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지 않고 인과관계만 본다는 점에서. 이런 태도는 죽음의 시대를 통과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누구나 죽음과 병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면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돼요. 그런데 이 길이 정해져 있는 길이고, 사람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음을 이야기로 설득한다면, 나도 마찬가지라는 걸 전제하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생겨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면 고통이 좀 덜해지니까요.”

우연히 결말을 만나게 된 소설

새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코로나19 시대가 아니었으면 쓰지 못했을 법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특히나 〈진주의 결말〉을 끝마친 사연은 독특했다.
“처음에 어떻게 해서 시작은 했는데 중간쯤 쓰다가 ‘못 쓰겠다, 펑크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마감을 하지 못한 상태로 친구들과 예정된 제주도 여행을 가야 했지요. 건축가 이타미 준Itami Jun의 수풍석박물관은 너무 좋았어요. 바람 박물관에 갔는데 갑자기 결말이 생각나더라고요. 돌아와서 결말을 썼고, 쓰면서도 지금 이 캐릭터가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제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그 캐릭터를 이해해 가는 과정 자체가 소설이었어요. 진주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죽이고 싶지만 동시에 사랑한 인물입니다. 남들에게 이해를 받으려면 이유가 필요한데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지요. ‘진짜 이해는 이유가 없는 거다.’ 진주가 그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소설에서 진주는 작중의 소설가에게 묻는다. “노력하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가 코로나19에 걸려서 죽었을 때 이걸 어떻게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겠어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죽어버린 거지요. 우리가 세상의 일을 이해하려면 그 이유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아무리 나의 논리로 세계를 파악하려고 해봐야 결국 패하게 돼 있어요. 삶은 나무로 만든 형편없는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거지요. 전복되고 부서져도 배를 고치고 내 힘으로 바다를 헤쳐서 나가는 것. 이유 없음을 받아들이고 언제 태풍이 올지 모르니 대비하는 것이지요.”

절판을 고려했던 책의 부활

《청춘의 문장들》은 그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30대부터 문학상을 휩쓸며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전업 작가의 삶은 언제나 불안했다.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고 닥치는 대로 썼다. 그는 처음에는 이 책을 낼 생각이 없었고, 절판시킬 생각도 몇 번 했다.

“오로지 생계를 위해 돈을 벌려고 CJ 잡지에 연재했던 거예요. 책을 내고는 창피해서 인터뷰를 안 했어요. 그때 저는 글은 작가가 창작해서 다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책을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제발 청춘의 문장들 안 좋다는 이야기 좀 하지 마세요’라는 핀잔도 많이 들었어요. 글에는 시효가 있어요. 시간을 이기는 것이 진짜 어려워요. 30년이 지나고 40년이 지나도 남은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에요. 100년을 살아남으면 고전이 돼서 책장에 꽂히는 거지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이건 제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고 이 책 자체가 힘이 있다는 뜻인 거예요. 살아남은 책에 작가가 잘 썼다 못 썼다 할 문제는 아니었어요.”
17년 전 쓴 글을 그는 다시 읽고 고쳐 썼다. 어떤 글은 버리기도 하고 새로 쓴 글을 더하기도 했다. 그는 요즘 주로 아침에 작업을 한다. 평균 3시간 정도. 책상 앞에 앉으면 전날 하던 작업을 그대로 다시 한다. 악보를 펴놓고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처럼. 하루 동안 생각이 달라져 고쳐 쓰기도 하고, 살을 붙이거나 아예 지워버리기도 한다. 변주를 통해 매일 10매 정도 늘어나면 만족한다. 원고는 쓰는 동안 계속 문을 열어둔다. 바람 박물관에서 경험했듯이 글은 바람처럼 자신의 몸으로 불어오고, 나간다. 며칠에 걸쳐 몸을 통과한 글만 살아남는다.
“늘 그렇게 똑같은 방식으로 썼어요. 목차를 뽑고 《청춘의 문장들》을 처음부터 다시 쓰는데 끝까지 다 써지는 글이 있고, 안 써지는 글이 있었어요. 기준이 뭐냐고 하면, 저도 모르겠어요. 지금의 몸을 통과하지 못하니까 빼버리는 거지요. 단지 제 몸에 안 맞았어요.”

글쓰기라는 일의 기쁨과 슬픔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작가가 젊은 날 써 내려간 이런 문장들을 보며 오늘의 청춘들도 밑줄을 긋는다. 50대가 된 작가는 청춘의 자신이 쓴 문장을 다시 읽고 써 내려가며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 넣었다.
“젊은 날의 저에게 ‘앞으로 일을 엄청 열심히 할 테지만 그렇게 생계나 일을 걱정하지는 말라고,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나중에 나이가 든 뒤에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인생이 있더라고요.”
어떤 일에든 기쁨과 슬픔이 있다. 작가의 삶에도 시련은 많다. 창작력의 고갈에 부딪히고 타인의 성취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스스로의 기준에 만족하지 못해 책을 오랜 시간 펴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는 50대가 돼서 자신을 너무 채찍질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됐다고 털어놨다.
“지나고 보니까 한창 일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30대와 40대 초반까지 정신없이 막 울면서 일했지요. 저는 그게 잘못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나중에 가면 일을 덜 하게 되거든요. 일의 총량 법칙이 아니고,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법칙이에요. 물론 그간의 과정에 성과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기쁨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예전에 비해 저를 몰아붙여서 써야겠다는 생각은 덜하게 됐어요. 쥐어짜도 안 나오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지요. 평안에 이르렀지요. 놀라운 것은, 그러고 나서 많이 쓰기 시작했어요. 인생은 완전히 패러독스Paradox예요. 지금은 더 많이 쓰면서도 예전에 비해 훨씬 고통이 없는 상태지요. 정신적 고통이 줄어드니 오히려 쓰고 싶은 게 생겨났어요.”

김슬기_《매일경제》 기자 | 사진 백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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