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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6월호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고가도로와 함께한 서울의 현대 근대화의 상징이자
비일상의 공간이던 고가도로

1960년대 후반,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으로 서울 하늘에 등장한 고가도로는 30년도 지나지 않아 ‘흉물’로 취급돼 우리곁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고가도로는 불특정 다수에게 열린 전망대이자, 한 시대를 기억하는 추억의 유산으로 우리 곁에 자리 잡았다.

아현고가도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행자에게 개방된 2014년2월 .상판위에 적힌 ‘고마워’ 문구가 인상적이다.

근대화의 상징에서 흉물로 변하다

1966년 6월 25일, 지금의 충정로역과 시청역 사이를 논스톱으로 잇는 왕복 4차로, 길이 492m의 서소문고가도로가 준공됐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고가도로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1월에는 광희입체교차로와 삼각지입체교차로 공사 현장에서 첫 삽을 떴으며, 2월에는 아현고가도로가, 8월 광복절에는 청계·삼일고가 도로가 기공됐다. ‘자동차 전용 육교’가 ‘고가도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무렵이었다.
고가도로 기공을 주도한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1966~1970년 재임)은 부산시장 시절 ‘불도저 행정’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서울시장으로 천거된 인물이었다. 취임 직후부터 사람과 차량의 분리를 주장한 김현옥은 이미 필요성이 제기된 지하철 건설을 미루고, 지하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고가도로를 서울의 교통난 완화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김현옥의 구상을 구체화한 이는 당시 정권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건축가 김수근으로, 그는 도쿄에서 유학한 경험을 살려 서울 도심을 감싸는 고리처럼 동그랗게 생긴 형상의 고가도로와 복개된 청계천 위를 관통하는 방사형 고가도로로 구성된 도시고속도로 계획을 입안했다. 이는 당시에 갓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 도쿄의 수도고속도로를 연상케 하는 계획이자, 건축과 교통망이 통합된 ‘메가스트럭처Megastructure’의 원리가 도입된 것이기도 했다. 김수근의 계획은 김현옥의 재임 기간에 지속적으로 논의해 건설 범위가 지금의 내부순환로 구간에 해당하는 서울 외곽 및 한강변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1968년 12월의 계획에 따르면 청계고가도로는 서울역고가도로 및 아현고가도로와 연결해 신촌과 마포 방면, 그리고 인천을 향해 뻗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김현옥의 원대한 구상은 가난했던 서울시의 재정난에 발목을 잡혔다. 결정적으로 1970년 4월 발생한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김현옥이 경질되면서 계획으로만 남게 됐다. 후임 양택식 시장은 취임 직후부터 지하철 건설을 추진했으며, 이후의 모든 시장은 김현옥과 같은 고가도로에 대한 열의(혹은 집착)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1999년에 개통된 내부순환로, 2002년에 개통된 북부간선도로 이외에는 서울의 시가지 한복판에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고가도로가 세워지는 일은 없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고가도로’라는 단어의 앞뒤에는 으레 ‘근대화’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고가도로는 ‘교통체계 근대화’의 상징이자 ‘서울의 근대화’ 나아가 ‘조국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광복 25주년을 기념하는 전면 화보에 등장하기도 했다. 삼일빌딩과 삼일고가도로가 나란히 선 모습은 1970년대 조국 근대화의 상징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고가도로의 ‘자랑스러움’이 퇴색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급격한 자동차 보유 대수 증가에 따른 교통 정체 심화, 배기가스로 인한 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계획의 패러다임이 ‘사람 중심’으로 변하면서 고가도로를 향한 시선도 바뀌어갔다.
본격적으로 간선가로 도시설계가 도입된 1983년 이후, 매스컴에서 고가도로의 수식어로 ‘흉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김현옥 시장 시절에 지어진 고가도로는 이미 1980년대부터 보수공사의 대상이 됐고,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마침내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논의까지 수면으로 올라왔다. 삼각지입체교차로가 1994년 철거된 것을 시작으로, 청계 및 삼일고가도로(2003년), 광희입체교차로(2008년) 등 고가도로 철거가 이어졌다. 고가도로가 ‘근대화’의 상징으로 서울 하늘을 수놓기 시작한 지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우리 주변에 함께하는 시대의 유산

서울의 고가도로는 ‘근대화’라는 프로파간다와 ‘보행 중심 도시’라는 패러다임의 알력 속에서 그 생명을 다했지만, 한편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움직이는 전망대’이기도 했다.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데에도 돈을 지불해야 하는 현대의 도시에서, 시내버스만 타면 손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고가도로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지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시선을 제공해주는 비일상적인 공간이었다.
수많은 이가 서울로7017(옛 서울역고가도로)에서 내려다본 숭례문과 서울역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이 바로 그 예시다. 동시에 고가도로 그 자체를 추억의 대상으로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생겨났다. 2003년 5월, 청계고가도로 걷기 행사가 개최된 이래로 아현고가도로,서대문고가도로 철거를 앞두고 진행된 걷기 행사에서는 시민 수천 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탄생부터 소멸까지, 서울의 고가도로는 도시계획과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가치관의 변화를 온전히 담아낸 시대의 도시계획유산Urban planning heritage이다. 앞으로 사라져갈 고가도로를 이런 관점에서 되돌아보면 어떨까. 서울의 도시계획이 지나온 한 시대를 추억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글·사진
김영준 도쿄대학 공학계연구과 도시공학전공 박사과정, 인스타그램 @서울의현대를찾아서 운영자
참고
《시정연구》 제2호, 서울특별시, 1968.12 《조선일보》, 1967.8.20 | 《공간》제11호, 공간사, 19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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