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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가장 사적인 연대



<쓰다> 33호 포스터

독서의 즐거움은 은밀하다. 우리는 눈치 볼 필요 없이 원하는 책을 고르고, 내키는 시간에 읽기를 시작하거나 중단한다. 아예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떤 책은 그저 책장에 꽂혀 있기만 해도 큰 기쁨이 된다. 어쩌면 독자는 책에 적힌 사소한 표현 하나가 불편해서 책을 영 덮어버리기도 하고, 짧은 구절 하나에 홀려 평생 한 명의 작가를 좇기도 한다. 나의 독서 습관 역시 종종 편협하며 자주 변덕스럽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사적일 수밖에 없는 취미를 통해 나는 타인을 만나고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책에서 만난 주인공이 나처럼 밤길을 무서워하니까, 책 속 어느 동네가 내가 살던 곳과 너무나도 비슷해서, 책에 잠시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왠지 친근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삶에 집중하고 싶고 그들 입장에 몰입해 보자 생각한다. 아니, 내가 굳이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어떤 책은 모든 장면마다 나를 거기에 세워두기도 한다. 특히 여성으로서 여성의 이야기를 읽을 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의 블로그를 찾아냈다. 치앙마이, 밤 문화, 그리고 그날 다녀온 클럽의 이름과 클럽이 있던 거리의 주소를 조합하자 가장 상단에 게시물이 떴다. 블로그는 치앙마이의 온갖 클럽이며 업소를 소개하는 게시물로 가득했다. 나는 전에도 그런 블로그를 본 적이 있었다. 치앙마이보다 훨씬 더 많은 유흥업소가 있는 방콕에서였다. 그들은 성관광을 목적으로 태국을 찾는 이들을 위해 가이드 역할을 하고 돈을 벌었다. 술집에서 바가지를 쓰지 않기 위해, 여자에게 높은 비용을 청구당하지 않기 위해, 또는 밤거리에서 위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또 모두가 찾아갈 수 있는 그저 그런 업소가 아닌 숨겨진 로컬 업소에 찾아가기 위해 자신이 필요하다고 광고했다.
정지향, 《리틀 선샤인》 부분

위 장면에서 외국 여행 중인 ‘나’는 게스트하우스 옆방에 묵는 한국인 남자의 블로그를 들여다본다. 별다른 관심은 없었어도 낯선 곳에서 만난 ‘같은 한국인’이라서, ‘나’는 종종 남자의 행동이나 태도를 지켜보고는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태국으로 여행 온 남성의 ‘안전하고 특별한’ 성매매를 돕는 일을 한다. 그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그와 ‘같은 한국인’이라서, ‘나’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는 게 조금은 안심이 되었을까? 블로그를 읽기 전까지 ‘나’는 어찌 되었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남자에게 일말의 친밀함 느끼고 있었을까? 소설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정지향이 그리는 ‘나’는 애초 그 남자에게 아무 관심도, 기대도 없다.
특히 남성과 그들의 세계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나’의 모습에서, 나는 그런 태도가 여성이 세계를 안전하게 살아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느낀다. 외부로 향하는 나의 감정과 관심을 닫은 채 살아가기. 나의 영역 안으로 아무도 초대하지 않기. 기대 없이 살기.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으니까. 이것을 건강한 삶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남자가 만들어놓은 세계가 나-여성을 함부로 착취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수많은 관계의 가능성을 포기하면서까지 획득한 그런 안전장치로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것일까? 전혀 아니다. 안전장치는 그저 한 여성의 목숨을 지킨다. 저 안전장치는 그저 한 여성이 덜 맞는 데, 덜 죽는 데 필요한 무엇이다. 남자에게 ‘안전’이란 개념은 ‘안전한 성매매’ 따위와 연관될 수 있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여자에게 ‘안전’이란 죽지 않기, 맞지 않기, 성폭행당하고도 되레 고소당하지 않기 등이 된다.

수많은 여성들이 ‘한 명’의 삶의 부분 부분과 동일한 경험을 겪었다는 뜻이고, 그러나 완전히 동일한 삶을 산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피해자의 일상 복귀’는 앞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모색해야 할 물음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것이자 수많은 여성들의 삶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다. 같고 다름 속에서 우리는 ‘동명이인의 연대자’일 수 있으며,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한에서 피해자는 잃어버린 익명성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지은, 《‘미투 서사’로/를 다시 읽기》 부분

이지은 평론가의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누군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이 당한 폭력에, 남이 고소당한 일에 왜 그리 신경 쓰는지, 어느 무심하고 무정한 여성의 얼굴에서 여성 독자인 나의 마음이 왜 그리 무너지는지. “그러나 피해자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것이자 수많은 여성들의 삶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다.” 이 인용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글 김잔디_웹진 [비유] 편집자
사진 제공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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