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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청년 시절 내가 믿었던 것어쩌다, 작가
‘적당한 삶’은 삶에 대한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고, 왠지 ‘진짜 삶’이 아닌 것 같아, 청년 시절엔 단일한 이상을 세우고 그것에 미친 듯이 나를 던졌다.
그 시절 내가 좇던 것은 ‘신기루’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지금의 나는 ‘그걸로 됐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한 명의 어른이 됐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 한 명의 작가가 됐다.

삶을 탕진한다는 것

나는 삶을 탕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의 탕진이란 단순히 방종이라든지 소비를 의미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삶을 불태우고 싶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열망 같은 것을 끄집어내, 내가 가장 도달하고 싶은 어떤 꿈에, 혹은 나를 사로잡는 가장 아름답거나 진정한 것에 나를 몽땅 바치고 싶었다. 그러니까 탕진한다는 것은 삶을 가장 진정하게 사는 일처럼 느껴졌고, 반대로, 삶을 그저 심심하게 놓아두는 것, 적당하게 흘러가게 두는 것은 삶을 가짜로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청년 시절 나의 믿음이라면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매일같이 열정을 노래하는 음악을 들었다. 세상의 거추장스러운 평판이라든지, 인생의 잡다한 기준이라든지, 현실을 위해 챙겨야 하는 구차한 요소들은 그저 다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부지런히 소위 ‘스펙’을 쌓고, 취업 스터디에 참여하고, 학점 관리에 온통 신경을 쏟을 때, 나는 나의 꿈이라는 것을 향해, 오로지 그 단일한 이상만을 향해 삶의 나머지 것들을 다 불태워야 한다고 믿었다. 내게 그것은 작가가 되는 일이었다.

걷는 대로 길이 되리라 믿었던

당시만 해도, 작가가 되려면 정확히 어떤 과정을 밟아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내 마음을 가장 깊이 울리는 작품들을 밤을 새워가며 끝도 없이 읽고, 또 매일 쉬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쓰다 보면, 나의 어떤 막연한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령, 헤르만 헤세의 전집을 읽고, 폴 오스터나 필립 로스의 소설을 탐독하고, 롤랑 바르트나 발터 벤야민, 알베르 카뮈의 책을 쌓아놓고 읽고 탐구하고 고민하면서 그에 관해 끊임없이 쓰다 보면, 나도 그들과 비슷한 무언가 되어 있으리라고 막연히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청년 시절 몇 년은, 몇 백 권의 책을 읽고, 몇 백 편의 예술영화 같은 것을 찾아보고, 몇 백 장의 글을 쓰면서 그렇게 보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작가가 되는 일이란, 그런 이상과는 다소 무관하게, 문예창작과 수업을 들으며 등단을 준비해야 하는 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또 꽤나 나중의 일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등단 준비 같은 것을 흉내내 보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오히려 나의 진정한 이상이나 꿈, 말하자면, 삶을 불사르고 탕진해 어떤 삶의 정수에 이르는 길로부터는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합평회에 참여하고, 등단한 작가의 수업을 돈을 내고 듣고, 신춘문예 소설집을 뒤져보면서 나는 이럴 바에야 고시 공부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건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었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써야 한다면, 차라리 행정고시나 임용고시에 도전하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어떤 내 이상으로 가는 길을 더 지켜내고 싶었는데, 그렇게 몇 권의 책을 되는 대로 출간하고, 대학원에 가서 더 시간을 유예시키며 나의 삶 깊은 곳에 이르는 기회를 얻고 싶었다.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시절

그런 식으로 청년 시절, 특히, 20대 시절이랄 것을 얼추 다 보냈을 때쯤에는, 나름대로 작가라는 것이 되어 있기도 했으나, 내가 좇던 이상 같은 것은 어쩌면 신기루 같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래도 알베르 카뮈나 롤랑 바르트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내가 작명한 필명이기도 한 ‘정지우’가 될 수 있을 따름이었는데, 내가 된 ‘정지우’는 내가 꿈꾸던 존재와는 여러모로 달라 보였다. 나는 말 그대로 20대를 탕진하여 30대의 정지우를 얻었는데, 과연 이것이 내가 그토록 얻고 싶었던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여러모로 들었던 것 같다. 결국 그렇게 몇 년을 더 보내면서, 나는 점점 막연한 이상을 좇기보다는, 그러니까 더 내 삶을 탕진하며 무언가에 이르고자 하기보다는, 그저 이 삶을 차분히 가꾸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렇게, 그제야, 나의 현실적인 위치 같은 것을 찾으면서, 내가 이 현실과 사회 어디쯤에 자리 잡아야 될까 고민하면서, 직장이든 직업이든 내가 발딛고 설 수 있는 땅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주위의 다른 모든 이들보다 참으로 늦게도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제는 꽤나 시시한 어른이 되어 또다시 나름의 직업이랄 것을 찾아가는 입장에 속해 있다. 일찍이 어떤 친구들은 주식이나 부동산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내가 고전문학을 뒤지고 있을 때 이미 대기업에 취직해 청약통장을 만들고, 내가 별 보러 뒷산에 오를 때 작은 자동차라도 할부로 구입해서 다녔다. 그럴 때도, 나는 그런 현실 같은 것이야 아무래도 좋은 사람처럼 저 별과, 하늘과, 먼 곳에서 부르는 바다와, 오래전 세상을 묘사한 음유시인 같았던 작가들과, 저 낯선 도시를 헤매던 방랑자들과, 우주를 고민하던 철학자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리라 믿으며 그토록 방황 같은 것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좇는 일이란, 그야말로 ‘탕진잼’ 같은 것이었고, 현실적으로는 내 통장에 숫자 몇 줄 찍어주지도 못할 것들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시절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그런 시절을, 그때의 마음으로 누릴 수도 없을 것이고, 어쩌면 다시 태어나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삶을 그런 식으로 탕진하면서, 그토록 이상에 젖고, 꿈에 취하고, 세상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그것으로 됐다. 그렇게 잘 살아냈으면 됐다.

글 정지우_문화평론가,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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