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이름을 가진 공원

석양이 아름다운 동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작은 공원이 여럿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길을 나선 것은 어느 일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구도심에는 이미 해가 서쪽의 인왕산 능선으로 막 넘어간 참이었다. 하지만 안산을 관통하는 금화터널을 빠져나오자 아직 이 일대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연희동은 안산과 궁동산 사이에, 마치 손바닥으로 감싼 것같이 포근하게 안겨 있었다. 늦여름 저녁의 따뜻한 빛이 동네에 전체적으로 감돌았다.
주택가라는 말은 이제 점점 사라지는 듯하다. 주택이 대부분 다세대나 다가구, 연립, 아파트 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주택이 있고, 거리가 있고, 가게가 있던 ‘동네’는, 아파트가 있고 차로가 있고 상가가 있는 ‘단지’가 되었다. 연희동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서울의 주택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큰길 주변에는 4층 이상의 건물이 제법 많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대부분 2층짜리 주택이다. 마당이 넓고 주택의 규모도 커서 한눈에 보아도 한때 부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노태우 등과 같은 권력자, 인근 대학의 교수, 그리고 인근 한성화교학교와 서울외국인학교의 존재로 짐작할 수 있듯이 다양한 외국인이 모여 살아온 곳이다. 그래서 서울이면서도 살짝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연희동의 중심가로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연희맛로다.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을 비롯해, 사람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 하도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이 길에서 한 켜 뒤로 들어가면 연희로 15안길이 평행하게 놓여 있다. 이 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동네 공원이 바로 이날의 목적지인 궁뜰 어린이공원이다. 공원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이 일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연희동 이름의 유래가 된 연희궁의 흔적이다. 조선 시대 서이궁이었던 연희궁은 지금의 연세대학교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궁동산 자락, 즉 지금의 연희동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도 여전히 살아 있다. 6·25전쟁 격전지인 104고지가 위치해 있는 궁동산은 물론이고, 아마도 현시대에 붙여진 이름일 궁뜰 어린이공원, 대궐재 어린이공원, 궁말 어린이공원 등 연희동 일대의 여러 장소에는 궁의 존재를 암시하는 이름이 붙어 있다.

다양한 이들에게 곁을 내준 투박한 듯 매력적인 공간

서대문구청에 따르면 이 공원은 1969년 5월 5일에 조성됐다. 50년이 넘었으니 그 연혁이 의외로 만만치 않다. 서대문구 연희동 123-5번지에 자리 잡은 면적 938.8㎡의 작은 공원이다.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의 시행규칙에 따르면 원래 어린이공원의 최소 면적 기준은 1500㎡지만, 이미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는 곳은 예외일 수 있다는 조건을 인정받은 듯하다. 인근 지역 지적도를 보면 기존의 개별 필지 3개 정도를 통합해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공원 자체의 디자인은 평범하다 못해 조금 진부하다. 그네, 미끄럼틀, 정자, 바닥 포장재, 각종 벤치 등이 알록달록한 색상 속에 그다지 조화롭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은 주변의 조경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칙칙한 담장이다. 길가에는 밝은 녹색의 투시형 펜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식재로 대체하거나 심지어 없애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공원이 인근 지역과 만나는 경계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이런 공원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설계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가 보유한 최고의 디자인 자원이 이런 일에 동원되지 않고 있음은 분명하다.
디자인적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궁뜰 어린이공원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바로 그 매력적인 입지 조건 때문이다. 이 작은 길모퉁이는 연희동의 주택가와 상업가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남쪽의 입구 맞은편은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이고 길 건너에는 목공 공방, 카페, 그리고 부동산(이름하여 ‘공원부동산’) 등이 있다. 연희동 일대에 있는 다른 동네 공원 주변이 거의 주택인 것에 비하면 훨씬 더 복합적인 위치다. 이런 경우 공원과 인근 상업시설은 서로 대체재이면서 보완재이기도 하다.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굳이 상업시설을 이용하기 원치 않는 사람들은 공원으로 가면 되고, 역으로 바로 옆에 공원이 있기 때문에 상업시설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주말이 끝나가는 한가한 저녁, 공원을 찾은 사람은 매우 다양했다. 그네를 타는 어린이,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 그리고 혼자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사람까지 모두 이 작지만 연륜 있는 공원의 품에 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