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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23백운산장 위의 기도바위에서 감읍(感泣)하다

북한산 인수봉 자락 기도바위

…사람들 중에서 그 영혼이 투명하고 영험하여 의심을 품을 줄 모르는 순일한 사람이 경건하고 엄숙하며 치우침 없이 올곧을 경우, 천상과 지상 간에서 항상 이치에 합당한 도리만을 유추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롭고 (知), 멀리까지 빛이 되어 광명을 널리 베풀 수 있을 만큼 성스럽고(聖), 모든 것을 훤히 비추어볼 수 있을 만큼 사리에 밝고(明), 모든 것을 죄다 간파할 수 있을 만큼 총명하게(聰) 되면 곧 신명이 강림하게 되는데 그런 남자를 박수, 여자를 무당이라 했다… -펑유란(馮友蘭) 《중국철학사》 ‘귀신’에서 인용
이 대목을 읽다가 눈이 확 뜨였었다.
아주 오래전, 내 소설을 다 읽고 난 무당 김금화 선생님이 말씀했다. “소설가가 뭔가 했더니 무당하고 비슷하네요.” 그의 목소리에는 큰 숙제를 아주 쉽게 풀어낸 사람의 우쭐함, 대단하다고 여기던 것이 실상 별것 아니라고 깨닫게 된 사람의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만 새로운 건 아니었다. 내게도 그가 느낀 것과 흡사한 것이 생겼다. 무당이 하는 굿과 소설이 같은 것인가? 사회적 기능이 같을까? 자꾸 의심이 갔다. 아마 나는 소설가가 무당과 같은 일을 하는 신분이라는 걸 강력하게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당으로 말하자면 자기 가족들로부터도 배척되는 미천한 계급이 아니냐. 그런데 같다니! 영리하면서도 담대한 김금화 선생님은 내 내면의 복잡하고 구질구질한 ‘차별 의식’을 확연히 보았을 것이다. 스스로는 차별에 대해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내면화된 계급의식을 씻지 못한 나약한 위선자였던 나. 내가 글에서나 말에서나 태도에서 보인 다양한 차별에 대한 분노는 기실 질투나 열등감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자괴감에서 놓여나기 위해 나는 더 열심히 무당의 삶과 굿을 공부했다. 그들이 믿는 여러 신과 무당이란 일을 통해 감내해야 하는 모진 모욕에 대해 취재도 하고, 굿판을 따라다녀 보기도 하고, 그들의 생활을 은연중에 살폈다.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김금화 선생님과 그의 굿을 구경하는 건 아니었다. 40~50대의 나는 존재 자체가 갈등 덩어리여서 거의 모든 시간과 나날이 고통스러웠다. 이런 고통의 대부분은 내 희망 사항과 현실의 부조화였다. 현실은 죄가 없다고 했고, 그러니 내 욕망이 문제였다.
나는 갈등의 대부분을 김금화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그는 나의 정신적 숨구멍이고 비밀을 천지간에 연기로 흘려보내는, 보이지 않는 굴뚝이었다. 그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다. 내가 미처 감각해 내지 못한 외로움, 부질없이 붙잡고 늘어진 욕망, 존재에 달라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 열등감 따위들. 그가 나를 북한산 백운산장으로 데려갔던 건 그런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돕기 위해서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1년에 두 번 산기도를 드리러 북한산으로 올라갔다. 음력 3월 3일 삼짇날과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이었다. 돼지머리도 가져가고 소 한 마리를 상징하는 부위들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런 건 특별히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이기도 했다. 제물은 따로 그의 제자가 산으로 날랐다. 삼짇날과 중양절은 해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우리는 도선사 주차장에서 내려 깔딱고개를 걸어서 넘어 인수봉 아래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 백운산장 쪽으로 다시 올라가야 했다. 한낮에도 어느 구역에선 쇠줄을 움켜잡고 오르고 내리는 길이었다. 나보다 열일곱 살이 많으신 선생님. 언제나 그렇듯 치마저고리를 입고 보온이 잘 되는 겉옷을 입은 그는 아주 침착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오르고 내리는 발걸음을 했다. 그는 나보다 더 차분하게 잘 걷고 자주 내게 헛발 딛지 말라고 하며 단속했다. 그렇게 해서 캄캄해진 뒤에 우리가 닿은 곳은 백운산장이다. 한밤의 백운산장은 한낮에 등산객에게 먹고 마실 것을 파는 집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나는 오랜 뒤에야 기도하러 갔던 곳이 백운산장이라는 걸 알았다.
때론 눈발이 날리고 진눈깨비가 흩뿌리는 날.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선생님을 맞는 그곳 작은 방은 방바닥이 절절 끓도록 뜨겁고 방 안 공기는 훈훈했다. 그와 나는 한두 시간 눈을 붙였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 세수를 하고 들어와 가방에 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다 말고 일어나 말이 어눌한 내게 그가 “선생님도 같이 가.”라고 했다. 어떤 때는 잠이 너무 깊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기도를 끝내고 간단히 음복을 할 즈음이기도 했다.
옷을 갈아입은 칠순의 무당, 세월이 흘러 팔순의 무당이 되어서도 바위를 기어올랐다. 백운산장의 지붕이 눈 아래 있고 너른 바위 한쪽으로 그의 제자가 차려놓은 제물이 있었다. 그는 두어 겹 깔아놓은 방석에 꿇어앉아 초에 불을 붙이고 술을 잔에 붓고 두 손을 비비고 징을 가볍게 울리는 등의 의식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두 손을 비비며 무어라고 주문을 외는데 얼핏 내 귀에 들리길, 우주 만물과 천지의 모든 신명을 부르고 그들에게 누군가의 이름과 사는 곳을 대며 보살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식은 한두 시간이나 계속되고 나는 그 정결한 모습에 감읍(感泣)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감읍의 순간 내 허욕이 씻겨나갔을지 모른다. 소설가가 어찌 지성명총(知聖明聰)의 경지에 오르랴. 그저 세속의 먼지 한 톨로 제 밥값이나 제대로 하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사진 김우선_시인, 지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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