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COLUMN

4월호

칠리앤트위그 <뱀파이어와의 하룻밤>
콜렉티브 뒹굴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
팬덤 오브 씨어터
올 초 연극계에서는 이채로운 일이 벌어졌다. 백현주, 김신록 배우 투톱으로 상연된 극단 신작로의 <비평가> 공연에 감명을 받은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관객 모임을 열고 그 자리에 창작진을 초대한 일이다. 2017년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 개봉관에서 내려간 후 코어 팬들이 자발적으로 영화관을 대관해 상영회를 열었던 것에 비견될 만한 일이었다. 스타 시스템에 기반한 미디어 산업의 영역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어느새 이 '외진' 연극계에도 출현하기 시작한 듯하다.
작년 연극계 미투 운동의 신호탄이 '연극·뮤지컬 관객 #withyou 집회'였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관객들은 이제 극장에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유령(phantom)의 지위에 머무르기를 거절하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리트윗과 해시태그를 통해 연극 팬덤을 구축하며, 팬덤 내에서 교환되는 정보와 의견들을 검토한 상태로 극장에 나타난다. <비평가> 관객 모임의 사례는 앞으로 관객들의 주도적인 행동 아래 이루어질 수많은 일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 변화의 흐름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가타부타 답을 내놓을 만한 시점은 아직 아니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2019년 초두에 상연된 칠리앤트위그의 <뱀파이어와의 하룻밤>과 콜렉티브 뒹굴의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 사례를 통해 팬덤과 연극의 상호구성이라는 측면을 얕게나마 들여다보고자 한다.

<뱀파이어와의 하룻밤>

칠리앤트위그의 <뱀파이어와의 하룻밤>은 레즈비언 뱀파이어 리자를 중심으로 얽혀 있는 퀴어적 관계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불멸자인 리자는 자신을 '박애주의자'라고 소개한다. 필멸자인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조금의 피. 리자는 마치 메뉴를 주문받는 베테랑 서버처럼 번민에 휩싸인 인간들을 여유롭게 응대한다. 섹스를 원하지만 안달내지 않고, 인간의 불안을 이해하지만 휩쓸리지 않는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들여다보며 "어떤 말을 해줄까?"라고 묻는 이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모습에서는 고전적인 기품과 장난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우리는 역사적 상황 속에 매여 있는 특수자는 여성으로, 시간을 초월해 살아가는 존재는 남성으로 지정하는 장르적 상상력에 익숙하다. 가깝게는 tvN 드라마 <도깨비>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시간여행자이거나 천재 박사, 아니면 신적 존재로 등장하는 남성들. 달리 말하면 우리에게는 여성의 몸으로 오랜 시간을 관류하며 살아가는 초월적 존재에 대해 상상해볼 기회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레즈비언 뱀파이어로서 리자가 갖는 캐릭터성은 흥미롭다. 리자는 절대자로서의 고독에 몰입하는 대신 끊임없이 나약한 인간들을 만나 그들과 대화하고 섹스를 한다. 연극은 리자의 전사를 늘어놓는 대신 뱀파이어와 마주치게 되는 미나, 윤오, 혜신과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들려준다. 리자는 스스로 역사와 철학의 주인공이 되는 대신 그녀들의 마음속에 내재한 관계에 대한 공포와 매혹을 이끌어내는 타자로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비인간의 장막 사이를 가볍게 활보하는 리자의 존재감은 무척이나 강렬하다.
<뱀파이어와의 하룻밤>에서 뱀파이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흡혈 행위는 상대방으로부터 무언가를 영영 가져와버리는 행위, 자아의 방벽을 무너뜨리는 에로스적 행위로 의미화된다. 이를테면 혜신은 어렸을 적 자신에게 키스했던 소녀가 뱀파이어였다고 확신한다. 입술 사이로 들어온 혀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영영 빼앗겨버렸고, 그날 이후로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믿는 혜신은 미칠 듯이 증오스러운 뱀파이어들을 찾아내기 위해 형사가 된다. 반면 스스로를 끝장내지도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안고 비틀거리고 있던 미나는 리자와의 하룻밤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에 대한 매혹에 사로잡힌다. 물론 그것은 벽장과 퀴어에 대한 훌륭한 비유이기도 하다. 뱀파이어를 '흡혈귀'(鬼)라고 고집스럽게 발음하던 혜신이 리자와의 조우를 통해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은 디나이얼(denial: 자신의 퀴어성을 부인하는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이 마침내 벽장을 열어젖히는 서사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 언저리를 떠돌고 있는 타자의 유령을 받아들이는 것, 그 과정의 지난함과 숭고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무용수 윤오의 재활 이야기이다. 한쪽 다리를 잃고 철제 의족을 차게 된 윤오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듯한 자신의 몸에 절망한다. 나를 나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윤오는 연인 미나와의 사랑 또한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안다. 자살 명소인 절벽가를 찾은 윤오는 우연히 조우한 리자에게 자신이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봐달라고 부탁한다. 물속으로 가라앉느냐, 아니면 부력(浮力)을 유지하며 헤엄치느냐 하는 종잇장 같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 속에서 윤오는 끝끝내 살아나온다. 그처럼 '다른 존재'와의 경계 속에서 유영하고 있는 인간들을 지켜보는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시선,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와의 하룻밤>이 관객들에게 건넨 위안의 형식이다.
<뱀파이어와의 하룻밤>을 둘러싼 SNS의 반응은 관객들이 자신의 사연과 역할을 온전히 갖고 있는 여성인물들로 이루어진 연극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관객들은 그런 소수의 연극이 런칭될 때마다 '갓극'이라 부르며 예매를 독려하고 '착즙' 포인트를 짚어서 올린다. "<박쥐>에서 뱀파이어가 된 김옥빈이 서울 언저리에서 지내다 여성애에 눈을 떠서 라리에 나타나는...걸 상상하며 봤"(트위터 HWA_R님)다는 소감처럼, 관객들은 연극에 대한 감상을 추상적인 언어로 땜질하는 대신 훨씬 사적이고 디테일한 언어로 기술한다. 그러한 기술은 때때로 실제로 존재하는 고유한 장소와 인물, 또는 관련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퀴어 커뮤니티 내부의 속사정을 이르집는다는 점에서 거의 민족지적 기술에 근접하는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러한 언어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팬덤은 극장에서 삶을 다한 연극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뱀파이어와의 하룻밤> 창작진은 공연이 종료된 후에 온라인상으로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관객과의 대화'가 통상적으로 창작진의 발언 위주로 진행된다면, 오픈 채팅방을 통해 이루어진 <뱀파이어와의 하룻밤>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관객들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소감을 자세하게 술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연극이 '레즈사회'의 문화를 정확하게 그려내서 놀랍고 반가웠다는 소감, 병원에서 절단 환자를 치료하다 보니 윤오에게 더욱 마음이 갔다는 소감, 또는 배우들에 대한 불타는 팬심 고백에 이르기까지 밀도 높은 대화들이 오갔다. 그 현장에 참관하고 있노라니 팬덤은 취향의 공동체인 동시에 평론의 공동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팬덤은 이제 자신의 언어로 연극을 설명하고 연극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한다. 느슨하지만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1인칭 시점들의 네트워크. 그것은 3인칭 시점으로 작품을 객관화하는 데 익숙한 평론가들이 좀처럼 가닿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퍼스펙티브이다.

뱀파이어와의 하룻밤 포스터

<뱀파이어와의 하룻밤> (사진 제공: 칠리앤트위그)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

한편 콜렉티브 뒹굴의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는 공연에 참여한 관객들을 하나의 은밀한 공동체로 '블록화'하는 영리한 전략을 보여준 케이스이다. 관객참여형 공연으로서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는 공연장에 참석한 관객들에게 '흡연자'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우리, 그동안 부정되어온 흡연권에 대해 어디 한 번 당당히 떠들어보자. 분명 신선하고 매력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이래도 돼?'라는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콘셉트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PC한 감각으로는 흡연권보다 혐연권이 우선하는 것이 사실이고, 흡연 가해에 대해 반성하지는 못할망정 끼리끼리 모여서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꼭 힘투(#Himtoo) 운동 마냥 백래시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당연한 우려와 호기심 사이의 감정들을 솜씨 좋게 가지고 노는 것이야말로 이 공연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는 홍보 단계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이 공연의 '반동적' 색채를 강조한다. 마치 애국보수 단체가 메신저상으로 전파하는 선동 찌라시를 흉내 낸 듯한 공연 홍보물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이번 공연을 견제할 거라는 첩보가 있다는 둥, 1996년 열렸던 제1회 궐기대회 때 주동자들이 실종되었다는 둥의 터무니없는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다. 창작진은 이렇게 그들이 내세운 콘셉트 자체를 가지고 이리저리 장난을 친다. 공연 당일에는 문 앞에 서 있는 티켓터가 상냥한 목소리로 "흡연자세요?"라고 물었다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별안간 관객을 때리며 험악한 목소리로 "금연하세요! 금연!" 하고 소리친다. 이러한 도입 장치들은 이 공연이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거나 사회적 의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직된 자세들을 해체하기 위한 일종의 놀이 공간으로서 설치된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케 한다.
공연은 자그마한 카페에 모두가 착석했을 때 시작된다. 누가 주최자이고 누가 순수한 관객인지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공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흡연권을 주장하는 흡연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쭈뼛거리던 사람들도 한 번 입이 트이고 나자 흡연자로서 느꼈던 설움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한다. 흡연자에 대한 시선, 흡연구역이 거의 없는 열악한 환경, 담배를 피우면 빨리 죽는다는 통념, 담뱃갑에 그려져 있는 혐오 그림 등등에 대한 불만이 이어진다. 이 공연에서 나오는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일종의 규약처럼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제법 뼈 있는 지적과 장난스러운 억설이 아무렇게나 섞여 나온다.
그러나 공연의 백미는 본격적으로 역할놀이가 시작되는 2부이다. 관객들은 추첨을 통해 임의의 직업, 연령, 성별이 적혀 있는 머리띠를 두르고, 그들 중에서 누구의 흡연권이 가장 보장되어야 하는지 경쟁적으로 토론하게 된다. 관객들에게 부여된 역할들 중에는 과연 저 사람에게 흡연권을 보장해주어도 되는지 망설이게 되는 역할들도 있다. 가령 금연상담센터 상담원처럼 그가 수행하는 직무에 위배된다거나,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아이돌처럼 사회적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거나, 임산부처럼 발암물질 문제가 염려되는 사람이라거나. 관객들은 흡연자들의 인권대회라는 콘셉트를 십분 즐기면서도 그들 스스로가 어쩔 수 없이 도덕적 저항감에 부딪히는 지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모순과 분열을 재치 있게 봉합하거나 스스로 무너져버리는 순간이야말로 이 공연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 된다. 관객들은 자신의 흡연권을 쟁취하고 타인의 흡연권을 부정하기 위해 흡연과 연관된 혐오 발언들을 거리낌 없이 패러디한다. 예컨대 70세 남성 슈퍼마켓 주인 역할을 맡았던 성수연 배우는 자신이 흡연하는 젊은 여성의 입장에서 들어왔던 노인 남성들의 혐오 발언을 능청스럽게 패러디하기도 했다. 그렇게 2부는 과녁과 화살을 맞바꾸고, 욕망과 금기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놀이의 장으로 기능했다.
최종적으로 흡연권을 쟁취한 3인은 임산부, 아이돌, 그리고 택시기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택시기사의 경우 일종의 젠더 벤딩 효과를 통해 우승을 거머쥐었다는 점이다. 택시기사는 설정상으로는 중년 남성이었지만 실제로 그 역할을 수행한 관객은 젊은 여성이었다. 그 관객은 여성 승객을 무례하게 대하는 일이 잦은 중년 남성 택시기사의 이미지를 뒤집어 여성이 안심하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택시를 만들겠다고 공약함으로써 다른 관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이러한 결과는 정말로 페미니스트 기사가 운전하는 흡연 택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연결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현실적인 니즈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무대 위에서 수행된 매력적인 액션에 대한 호응에 가깝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뜻밖의 길을 찾아내는 영민함, 현실을 '예쁘게' 조작하는 연극적 가상의 힘이 잘 발휘된 사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흡연하는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 해로움을 감수할 용의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타임머신이 개발된다면 대부분 담배를 안 피웠던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 흡연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면 일단 말리고 보겠지만 금연을 강요하는 논리에 대해서는 화가 날 것이다.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는 우리가 이 모든 상반된 의견들을 동시에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옳고 그름의 문제로 경화(硬化)되어 있는 현실의 표면을 비집고 들어가서 우리가 실제로 경과하고 있는 복잡한 미결정의 지대들을 바라보는 것.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는 그러한 회색지대를 펼쳐놓기 위해 관객들로 하여금 기꺼이 모순을 자처하도록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모순이 모순이 아니었음을 증명해낸다.
관객을 믿되, 관객에게 내맡기지 않는다. 관객참여형 공연이라는 형식에 있어서도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는 여러모로 모범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흡연자들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부여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의제 토론이 되지 않도록 제한하고, 역할놀이라는 안전장치를 통해 공연 참여자들이 마음 놓고 설칠 수 있도록 만든다.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는 결코 넓은 범위의 관객들에게 오픈될 수 없고 또 여러 번 반복될 수 없는 종류의 공연이다. 어떻게 보면 '보편성'이나 '개방성'을 버리는 대신 소수의 관객과 더불어 재미있는 공연을 하겠다는 창작진의 뚝심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뱀파이어와의 하룻밤>이 팬덤을 끌어당기는 연극이라면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는 팬덤을 구성해내는 연극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연극 모두 아주 구체적인 관객들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팬덤과 연극은 서로의 얼굴이 보일 만큼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이 새로운 현상 앞에서 연극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할 시간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 관련사진

<제2회 흡연자 인권대회> (사진 제공: 콜렉티브 뒹굴)

글 김민조_연극평론가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희곡을 전공하고, 2018년 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평론부 간사 활동과 연극비평집단 시선의 필진 참여를 통해 연극평론을 시작했다.
2019년부터는 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편집위원과 웹진 연극in의 필진을 맡고 있다. 극단 엘리펀트룸에서 드라마터그로 활동하고 있으며, 젊은 창작자들의 페스티벌인 화학작용4에서 드라마터그 노릇을 하고 있기도 하다.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