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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가짜 황석영을 만나다

후암동의 젊은 느티나무

농경시대를 벗어나 가치 중심이 ‘돈’으로 옮겨가는 열풍이 불기 시작하던 때, 미아리고개 너머 개운산 북쪽 자락에 붙여 지은 학교. 높은 산에 눈이 남아서 봄날에도 불현듯 차가운 바람이 소스라치게 불곤 했다. 강의를 시작한 첫날엔 문예창작과 4강의실이 빼곡했다. 100명이 넘었다는 수강생 중엔 남학생이 훨씬 많았다. 우리는 대개 어린 날부터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인, 그러나 그 꿈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황막(荒漠)했을 것이다. 서로 낯이 설지만 어쩌다 눈이 마주치거나 말을 걸고 싶으면 고향부터 묻는 게 순서 같았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 나고 자란 학생은 가뭄에 콩 나듯 했고 대개 말투가 사뭇 다른 산지사방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먼 제주도로부터 강원도 동북쪽에서 온 청춘까지.
하여간 통성명을 하고 전공을 묻고 그러면서 아는 사람을 넓혀가는게 보통의 방법이었다. 이럴 때였다. 어떤 남학생 하나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 낯빛이 가무잡잡하고 남자 키론 중간은 될 듯싶었다. 인상은 다부졌다. 약간의 경계심과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접근 반경으로 엉거주춤 들어섰다. 그가 묻는 말에 따박따박 대답도 했다. 이를 테면 신원증명서를 말로 제출하는 순서였다. 그다음의 진술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장차 무엇이 되고 싶은가, 였다. 나는 심장이 불타다가 얼어붙곤 하는 질병증상을 억누르며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춘문예나 사상계로 등단하고 싶다는 포부도 말했다. 바로 이 순간 그가 내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을 했다. 자신은 이미 고등학교 때 사상계로 등단을 한 사람이란다!
“입석부근……요?”
경복고등학교 학생으로 신인상에 입상한 황석영이 쓴 소설 제목을 말했다.
“내가 그 황석영이야!”
나는 찰나에 정신 줄을 놓쳤다. 하늘의 별 하나와 마주 앉아 있다니!
“……소설가가 되려면 사회를 알아야 해. 사회의 밑바닥을……경험을 쌓아야 해!”
그는 대강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하여간 ‘타인의 삶을 체험’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그 도움의 첫 번째 실천이 ‘서울역’ 체험이었다. 그는 바쁘지만 나를 위해 그런 시간을 내고 서울역엔 아는 ‘형님’이나 ‘동생’들이 많다고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서울은 5년 사이에 인구가 100만 명이 늘었고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로 간 젊은이들의 외화송금에 월남파병 장병들의 송금으로 뭔가 들뜨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국토개발이란 소재로 제2한강교가 생겼고 ‘불도저’란 별명을 얻게 될 30대의 김현옥이 시장으로 부임했다. 무언가 가난해선 안 되며 잘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정치권력 상층으로부터 아래로 무책임하게 살포되는 분위기였다. 서울역은 도시와 농촌이 맞닥뜨리는 대문이고 광장이었다. 밤새워 기차에 시달리며 새벽에 내린 도시물정 모르는 순진한 농촌 사람들을 ‘돈’으로 보는 여러 가지 사기꾼들은 지식인인 듯 차리고 다녔다. 어리거나 젊은 여성은 사창가로, 남자는 알거지로 만드는 기술을 요술처럼 부리며 사는 부류였다.
황석영은 이런 곳, 그러니까 서울역 광장의 건너편, 양동이라고 불리는 매매춘 집단구역의 아래쪽에 있는 ‘다방’으로 데려갔다. 다방은 마치 기차처럼 공간이 길쭉했다. 그는 나를 안쪽자리에 혼자 앉혀놓고 자신은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학교에서 소설을 이야기하던 그와는 딴사람 같았다. 태도와 표정이 그랬다.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다가 건장한 청년을 데려와 나를 소개했지만 그는 얼핏 보고 그냥 돌아갔다. 다방 안은 들락거리는 사람들로 난장판 같았다. 너무 많은 사람, 천장으로 올라가 부딪고 내려오는 무수한 말소리, 뿌연 담배연기, 자리를 미끄러지듯 돌아다니며 양담배와 라이터, 손톱깎이와 손칼 등이 들어 있는 목판을 맨 소년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젖먹이 아이를 들쳐 업고 구걸하는 거지 여성……. 정말 정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황석영은 나타나지 않고 그가 말한 서울역이며 밑바닥에 대한 강의도 더는 들을 수 없었다. 그가 내게 마실 거라도 사줬던가?
나는 불길한 느낌과 실망에 시달리다가 결국 뒤늦게 나타난 황석영으로부터 ‘바빠서 그러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이날 이후 황석영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1973년 등단한 이후, 황석영 소설가를 만나게 됐다. 1966년 봄날에 보았던 그 황석영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있었던 황석영과의 일을 소태 씹는 기분으로 추억하며 말했다.
“나를 팔고 다니는 가짜들이 전국에 있대!”
황석영 소설가가 말했다.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사진 김영호_서울문화재단 혁신감사실 혁신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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