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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

미디어아티스트 전소정삶과 예술의 교차점에 주목한 영상 미학
미디어아티스트 전소정은 타인의 내밀한 드라마에 주목한 작가다. 그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에 선 이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바탕으로, 영상설치, 독립출판, 프로젝트 밴드 활동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을 펼쳐왔다. 송은미술대상 대상(2014), 광주비엔날레 눈 예술상(2016)에 이어 제18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2018) 등을 수상하며 한국 미디어아트의 젊은 대세로 떠오른 그를 신사동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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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정은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했다.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등의 레지던시를 거쳤고, 스트라스부르, 헬싱키, 뉴욕, 타이베이, 파리, 바르셀로나 등지에서 여행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축적한 ‘이동의 경험’은 작품에 고스란히 스몄다.
대표적인 작업이 2008년부터 2015년경까지 진행한 비디오 연작이다. 작가가 주변에서 만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일련의 싱글채널 비디오로 기록했는데, 자신만의 전문 분야에 몸담은 이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파생됐다.
“이 작업의 출발이 된 인물이 있어요. 핀란드의 숲속에서 자신만의 마을을 짓고 고립된 삶을 살았던 무용수 엘리스였는데, 그가 살았던 공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죠. 시계탑도 있고 댄스홀도 있고 손님을 맞는 호텔도 있는 작은 이상향 같은 곳이었어요. 그의 실천으로서의 삶과 예술의 이야기에 사로잡혔지요.”
2008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09년 <Three Ways to Elis>라는 일종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들어 이듬해 발표했다. 핀란드 무용수 엘리스의 삶을 기억하는 세 명의 지인이 각자의 관점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자발적 고립을 택한 예술가의 삶이 현실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질문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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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핀란드 무용수 엘리스의 삶을 세 명의 서로 다른 시선으로 조망한 <Three Ways to Elis>, 2010.

2 경계와 이동에 관한 경험담을 엮어내는 <광인들의 배>, 2016.

3 ‘크리틱’의 철자를 뒤집어 제목으로 삼은 미래 비평집 <유키틱>(EUQITIRC), 2012.

자신만의 예술적 경지를 탐구하는 이들의 이야기

이 작업을 계기로 전소정은 삶의 현장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 전문가들과 함께한 비디오 연작이다. 전소정이 주목한 ‘전문가’들은 흔히 말하는 명장이나 달인이 아니다. 변검술사나 줄광대 등 전통연희에 몸담은 인물부터 김치공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미싱사, 구두 수선공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외길을 걸어온 이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대상 인물의 영상 위로 흐르는 비전문 성우의 내레이션, 인터뷰를 토대로 극화한 글, 주제와 연관 있는 고전의 텍스트가 어우러진 작품은 한 편의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하다.
‘일상의 전문가’ 시리즈라는 별칭을 얻은 이 작품들은, 언뜻 보기엔 타인의 삶을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이 작업이 “그들의 삶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이들이 스스로 정한 예술적인 이상에 자신을 몰아붙이는 태도가, 예술가의 태도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면의 또 다른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

그의 작업에서 계기가 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에 허구와 실제가 교차하고, 적절한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신문기사에서 읽은 작은 실마리가 작품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2012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어 갤러리 팩토리에서 개최한 개인전 <이면의 이면>도 그러하다.
“대부분 2년 정도 해외에서 체류하며 만든 작업인데, 뉴스 사회면에 작게 실린 글에서 출발했죠. 예를 들면 인도 뭄바이 테러 당시 죽은 척하는 연기로 목숨을 구한 아랍계 영국인처럼, 개인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의 글과 이미지로 환원하는 작업이에요. 헤드라인에 실리는 거대한 이슈가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었죠.”

개인의 드라마를 기반으로 펼쳐지는 감각 실험

2016년 한 네프킨 파운데이션(Han Nefkens Foundation)의 초청으로 3개월간 바르셀로나에 머물 때 시각장애인 무용수 호안을 만난 일은 그에게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다. 호안은 “맹인의 관점을 익히면 비디오 작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시각장애 체험을 제안했다. 앞이 보인다면 5분 내로 돌아볼 수 있을 만한 작은 모퉁이를 눈을 가리고 걷는 체험이었다. 실제로는 3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지팡이를 짚고 눈을 가리고 도시를 경험했는데 그 인상이 굉장히 강렬했어요. 조각을 전공해서인지 지팡이 끝으로 느껴지는 촉각적인 도시의 형상이 이미지로 그려지더라고요. 그 경험이 <광인들의 배>(The Ship of Fools, 2016)와 이후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이듬해 파리에 체류하면서 만난 한국계 입양인 친구들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2017년 제작한 비디오 <Interval. Recess. Pause.>도 그러한 감각 실험의 연장선에 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어요. 한국에 대한 유년기의 인상에 관한 건데, 시각적인 이미지는 불확실한 반면 소리나 냄새, 맛과 같은 감각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선명하더라고요. <Interval. Recess. Pause.>에서 그들과 함께 우회적 감각의 번역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방법, 혹은 만져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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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로젝트 밴드 ‘검은 밤’의 공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2015.

5 프로젝트 밴드 ‘검은 밤’의 뮤직비디오 스크리닝 전시 <검은 밤, 비디오 나이트>, 2018.

소규모 출판과 프로젝트 밴드 ‘검은 밤’

미디어아티스트의 주된 표현수단은 영상이지만, 그는 굳이 매체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직접 찍은 영상과 직접 쓴 소설이 작품 속에서 교차하고, 인상 깊게 읽었던 고전문학의 한 구절에서 차용한 개념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로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비디오가 복합적인 매체들의 결합이고, 이야기하는 방식 자체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란다.
소규모 출판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그간 인연을 맺은 큐레이터와 비평가 8명에게 ‘아직 탄생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비평을 청탁하고, 이를 묶어 책을 만들었다. 2016년 펴낸 이 책의 제목은 <유키틱>(EUQITIRC). 크리틱(CRITIQUE)의 철자를 뒤집어 만든 신조어다.
“처음 원고를 요청했을 땐 다들 당황했어요.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전제로 글을 쓰는 사람들인데, 청탁한 원고는 제가 해온 과거의 작업과 앞으로 펼칠 작업에 대한 총체적 관점, 그리고 자신만의 미학적 이상에 대한 관점을 동시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소설, 편지, 실제 비평문까지 굉장히 다양한 형식의 글이 등장하는 바람에 난해하면서도 재미있는 일종의 ‘미래 비평집’ 출판 프로젝트가 됐어요.”
그는 프로젝트 밴드 ‘검은 밤’의 정식 멤버이기도 하다. 가사를 쓰고 노래와 연주도 한다. 2018년 12월에는 뮤직비디오 스크리닝 전시 <검은 밤, 비디오 나이트>를 열었다.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낙원악기상가 내 d/p에서 열린 전시에서는, ‘검은 밤’의 첫 앨범에 수록된 12곡에 해당하는 뮤직비디오 12편을 2주간 상영했다. 일련의 출판 및 프로젝트 밴드 작업은 일종의 놀이이자 새로운 방식의 협업이다. 또한 여러 협업자와 쌓아온 유대관계와 연대를 시각화한 것이기도 하다.

통합적 예술 창작의 산물

“제가 비디오를 활용하는 태도는 통합적이에요. 비디오 매체 자체가 복합적인 장치이기도 하지만, 소리의 차원이라든지 이미지의 요소, 텍스트나 음성, 인물, 심지어 편집의 호흡까지도 통합적인 방식으로 활용해요. 한 작가는 제가 영상을 사용하는 방식이 연극적이라고 하더라고요. 흥미로운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공감각’에 대한 사유처럼 서로 다른 매체를 연결하거나 실험하는 과정이 저에게도 중요한데, 그렇기 때문에 제 작업이 ‘검은 밤’과 같은 음악 프로젝트나 <유키틱> 같은 출판물 등 다양한 형태로 나오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작업을 펼치는 전소정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그는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간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서는 ‘생의 수집가’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다시 바라보거나, 저를 반추하는 작업 과정 때문인 것 같아요. 이 표현 역시 제 작업의 한 측면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지요. 수집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안의 인물들과 나눈 대화, 제 안에 일었던 변화의 순간들을 모두 포함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어요.”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의 의미

작년 12월 들려온 제18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이라는 낭보는, 장르를 넘나드는 전소정의 다채로운 실험이 한국 미디어아트의 토양에 단단히 뿌리내렸음을 보여준다.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은 2000년 에르메스 코리아가 외국 기업 최초로 한국 미술계 지원을 통해 한국 문화예술계 발전에 기여하고자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장영혜, 김범, 박이소, 서도호, 박찬경 등 역대 수상자들의 면모도 쟁쟁하다.
이번 수상으로 전소정은 향후 에르메스재단에서 지원하는 파리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4개월간 참여할 자격을 얻었으며, 2020년에는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지하 1층의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개인전을 연다. 그는 “일회적인 수상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재단과 함께 2년 후의 개인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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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삶에 빗대어 예술가의 이상과 현실을 관조한 <마지막 기쁨>, 2012.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만나는 작품들

전소정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기획전시실에서 오는 9월 16일까지 열리는 소장품전 <별 헤는 날: 나와 당신의 이야기>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전통 계승자이면서 동시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기도 한 줄광대의 모습을 통해 예술가의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보여주는 <마지막 기쁨>(Last Pleasure), 제주 해녀들의 노동요인 <이어도사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현실과 신화의 경계를 오가는 해녀들이 등장하는 <보물섬>(Treasure Island), 세 평 남짓한 가게를 40년 넘게 지켜온 기계 자수사의 이야기인 <어느 미싱사의 일일>(A Day of a Tailor), 열두 음계의 방에서 세상을 조율하는 조율사의 모습을 담은 <열두 개의 방>(The Twelve Rooms) 등 싱글채널 비디오 네 점이 상영된다. 그는 이 네 점 중 특별히 마음을 둔 작품으로 <마지막 기쁨>을 꼽았다. “줄광대 김대균 선생님이 ‘줄 위에서 이상적인 기쁨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카프카의 작품집 <단식광대>가 떠올랐어요. 그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인 <최초의 고통>에 유랑극단의 공중곡예사가 등장하는데요. 그는 공연하면서 줄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는 순간에 굉장한 고통을 느껴요. <마지막 기쁨>은 이 <최초의 고통>을 반의적으로 표현한 제목이죠. 예술가로서 가진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김대균 선생님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작업이에요.”

멀티미디어 시대, 미디어아트를 즐기는 첫걸음

유튜버가 신종 직업으로 부상하고, 누구나 휴대전화로 간단히 영상을 찍어 올리고 편집하는 세상, 바야흐로 멀티미디어가 대중화된 시대다. 그러나 매일같이 모바일 기기나 PC로 다양한 영상을 감상하면서도, 정작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미디어아트에 대해서는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그는 일단 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부터 시작해보라고 조언했다. ‘이건 현대미술이라 너무 어려울 것 같아’라는 선입견이 막연한 거부감으로 이어지고, 그 탓에 실제보다 작품이 난해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대부분 비디오아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걸 힘들어해요. 사실 미술 전공자조차 비디오아트를 전공하지 않았다면 러닝 타임이 끝날 때까지 보는 걸 어려워하죠. 하지만 그 순간을 겪어내고 나면 각자의 배경 안에서 작품을 향유할 수 있어요. 내용과 형식의 긴장 관계나, 비디오가 순환되는 플랫폼에 집중하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비디오 작품을 이루는 복합적인 장치들로부터 작가의 예술적 실천을 읽어낼 수도 있겠지요.”

글 고경원 자유기고가
사진 손홍주
사진 제공 전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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