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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여행작가 송은정의 염리동 소금길낡아서 아름다운
여행작가 송은정은 4년 전, 염리동 소금길에 여행책방 ‘일단멈춤’을 열었다.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은,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낡은 골목의 매력에 빠졌다. 지금 책방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만들어낸 일상의 풍경은 여전히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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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잠시 멈추시고…

그러고 보니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막연한 긍정과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회사를 박차고 나온 뒤 ‘책방’을 차리겠다며 서울 구석구석을 걷고 또 걸었던 것이. 여행을 주제로 한 단행본과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는 책방의 이름은 ‘일단멈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사연을 듣다 우연히 낚아 올린 이름이다. “일단은 잠시 멈추시고…” 디제이의 나긋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하늘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문장을 고스란히 메모지에 옮겨 썼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예비 자영업자였지만 적어도 공간에 대해서만큼은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을 것. 장소의 의외성이다. 책방으로 향하는 길이 낯선 도시를 방문하는 여정과 닮길 바랐다. 그렇다면 단순히 여행책을 구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다 구체적인 감각으로 여행책방이라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일시적 여행자’들이 고심 끝에 고른 새 책을 손에 쥔 채 ‘일단멈춤’ 주변을 느릿느릿 산책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걸렸다.
서울에서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공간 임대료가 터무니없이 비싸거나, ‘서울스러운’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바람에 아쉽지만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출퇴근 교통비를 고려해 집에서 가까운 마포구 망원동을 시작으로 연남동, 연희동을 거쳐 용산구와 성북구를 전전하다 알게 된 곳이 바로 염리동 소금길이었다. 마땅한 공간을 발견하지 못한 채 이대로 창업의 꿈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나서야 새로운 길이 나타난 것이다.
염리동은 알고 보니 사진을 취미로 하는 이들에겐 꽤 유명한 출사지였다. 서울시 범죄 예방 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된 전형적인 벽화 마을. ‘소금길’이라는 명칭은 소금창고가 많았던 과거의 흔적에서 유래했다. 미로처럼 촘촘히 얽힌 골목에는 전봇대마다 번호판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곳에 처음 온 방문객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한 조치였다. 한술 더 떠 도로에는 선명한 개나리색 라인이 그려져 있어 열찻길을 걷듯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무사히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개구리 심보인 나는 개나리색 라인을 기꺼이 탈선하기로 했다. 때로 잘못된 기차가 우리를 바른 목적지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영화 <런치박스> 속 대사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선물 같은 동네

염리동은 낡은 동네였다. 애써 알록달록한 옷을 입혀 놓았지만 켜켜이 쌓인 세월의 테를 감추지는 못했다. 자연히 새것보다는 오래된 것이 자주 눈에 띄었다. 단골 손님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동네 목욕탕과 가게 입구에 닭장을 놓아둔 세탁소, 30년째 영업 중인 문구점, 나무 그늘 아래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 익숙한 듯 낯선 일상의 풍경으로부터 나는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쇼핑거리로만 짐작하고 있던 이대역 부근의 소란한 이미지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시큰둥했던 발걸음에 서서히 속도가 붙었다. 어서 움직이라며 호기심이 내 등을 떠밀었다. 핑크색으로 담벼락을 덮은 19번 골목길에는 주민들이 내놓은 각종 잡동사니와 그릇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무료로 가져갈 수 있게끔 해둔 것이다. 따로 돌보는 사람이 없어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긴 했지만 가만 살펴보니 그야말로 코리안 빈티지의 향연. 썬키스, 비락우유 등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옛 브랜드 로고가 박힌 유리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중 하나를 골라 엄지손가락으로 유리컵 표면의 뽀얀 먼지를 쓱 문질러 닦았다. 흠 하나 없이 맑고 곱다. 상태를 확인한 뒤 그대로 가방 한구석에 챙겨 넣었다.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것마냥 이상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염리동이 내게 그런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을까.
그 길로 곧장 부동산 서너 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염리동 소금길 49번 골목에 여행책방 일단멈춤을 열었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일단멈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염리동에서 보낸 2년간의 추억은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라는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공간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수많은 이야기는 여전히 내 삶에 남아 있다. 일단멈춤의 마지막 결말이 쓸쓸하지 않은 이유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책방을 열 것이라는 나의 대답에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던 부동산 공인중개사들의 반응이. 그 흔한 카페 하나 없는, 하물며 상점이라고는 슈퍼마켓과 철물점, 국밥집이 전부인 동네에 책방이라니.“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기가 마음에 든다구요!”라고 차마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 게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글·사진 송은정 서울의 낡은 골목에서 여행책방 ‘일단멈춤’을 운영했다. 지금은 거실 옆 ‘집 업실’에서 여행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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