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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과학과 사람들’ 원종우 대표의 오금동 지하 연습실어쨌거나, 청춘이었기에
록 뮤지션, 저널리스트, 다큐멘터리 작가 등으로 활동했던 ‘과학과 사람들’ 원종우 대표는 20대의 초중반을 유목민처럼 생활했다. 1년이 멀다 하고 옮겨 다녔던 수많은 동네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지하 연습실에서 생활하며 음악을 만들었던 오금동이다. 난방도 안 되고 온수도 나오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꿈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젊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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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돌도 안 되어 부산으로 이사했다. 서울로 ‘돌아온’ 것은 근 20년이 지나 대학에 입학하면서다. 낯설지만 늘 동경했던 서울에서 대학생으로 생활하며, 동시에 밴드를 하고 글을 쓰면서 지역을 돌아다녔다. 20대 초중반의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외대 앞, 상계동, 여의도, 종암동, 오금동, 포이동 등지를 배회했으니 돌아다녔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각각의 동네에는 각각의 개인적인 키워드가 남아 있다. 처음 부모님을 떠나 살았던 외대 앞 옥탑방과 관련해서는 다른 복잡한 기억보다 단돈 2,000원이면 먹을 수 있던 작은 곰탕집이 남아 있다.상계동에는 새벽 5시 30분부터 천둥소리를 내던 화물열차, 여의 도에는 어울리지 않게 신식 건물 안에 살던 쥐들, 이런 식이다. 이렇게 끄집어낸다면 어디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1년 남짓 살았던 오금동의 지하실이다.

한겨울의 화장실 전쟁

송파구니 이른바 강남에 속하지만 90년대 초반의 오금동은 강남은커녕 시골의 작은 읍내 같은 곳이었다. 시멘트로 대충 발라놓은 좁은 길들, 그리고 양쪽으로 늘어선 작은 집들과 구멍가게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올림픽공원과 선수촌아파트의 화려함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동네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단연 허름했던 그 단칸 지하실. 지금이라면 그런 곳에 하루라도 살 수 있을까?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이라면 당시에도 터무니없이 싼 축이었다. 그런 곳에 산 이유는 밴드 연습 때문이다. 굳이 집과 연습실을 가르느니 동료 한 명과 함께 살면서 돈을 아끼고 음악을 생활화하자는 취지였는데, 문제는 난방이 없고 온수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는 점이다.바닥은 습기가 찬 것을 넘어 물이 흥건할 정도라, 방산시장에 가서 두꺼운 비닐을 잔뜩 사와 바닥을 덮은 후 그 위에 다시 싸구려 카펫을 깔았다. 그러고도 물론 전기요와 전기난로가 필수였으니 과연 집세가 싼 만큼 경제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곤란했던 건 실내와 연결된 화장실이 없었다는 점이다.화장실을 가려면 계단을 올라와 셔터를 올리고 골목으로 나가 1층의 쌀집 뒤로 돌아서 들어가야 했는데, 전체 거리가 50m는 족히 됐다. 여름이나 낮에는 귀찮을 뿐 별 문제가 아니지만, 겨울밤에는 화장실 한 번 가려면 혹독한 추위를 마주해야 함은 물론, 화장실이라는 곳 자체도 도무지 훌륭하지 못해서 버티고 앉아 있는것이 고문에 가까웠다. 젊었으니 버텼지 지금 같으면 턱도 없다

열악했지만 특별했던 공간

그런 열악한 곳이었지만 왜 지금껏 기억에 남아 있을까. 단지 열악했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친구는커녕 아는 사람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서, 좌고우면(左顧右眄) 끝에 처음으로 만든 밴드와 연습실은 내게 무척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꿈을 키우며 작곡과 연습에 매진했고 실제로 이후 ‘배드 테이스트’라는 밴드명으로 발매되었던 곡의 상당수가 거기서 태어났다. 청천벽력과도 같던 커트 코베인의 자살 소식을 접한 곳도 그곳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술도 많이 마셨고 담배도 많이 피웠으며 건강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장소와 관련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꾼 꿈이다. 환경이 그러니 어떤 악몽을 꿔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특히 어느 여름날 새벽에 꾼 조선시대 무당의 꿈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장바닥에서 흰 소복을 입고 춤을 추며 등장해 분칠을 한 사람 같지 않은 얼굴을 내게 바짝 들이댄 것도 모자라, 가위에 눌린 내 귀에 떠나지 말라며 속삭이기까지 하던 그 무당. 그 지하실에서 이 꿈을 한 달 간격으로, 마지막 속삭임까지 포함해 2번 꿨다. 너무 이상하고 또 생생했기에 정말 귀신에 홀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과학을 말하고 사는 내가 그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선 안 되지 싶다.
그곳을 떠난 지 이제 25년쯤 된 것 같다. 한 해 정도 살다가 조금 넓고 나은 지하 연습실로 옮겼고, 거기에는 또 거기대로의 드라마가 있지만 생략하자. 아직도 이 귀신 들린 오금동 지하실이 남아 있을 리는 없다. 아마 번듯한 아파트가 들어서고도 족히 20년은 지났으리라. 내 생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한 시절을 보낸 그곳이 지금은 흔적도 없다. 자전거를 타고 마천동 친구 집을 오가던 24살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서울은 정말 빨리 변한다. 내가 지난 30년간 살아온 이 서울을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이유가 어쩌면 그것인지도.


글·사진 원종우 필명 파토. 무엇으로도 규정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록 뮤지션, 저널리스 트, 다큐멘터리 작가 등의 이름을 붙여가며 살았다. 현재는 ‘과학과 사람들’ 대표로, 누적 3,500만 다운로드의 <과학하고 앉아있네> 팟캐스트를 만들고 있다.
사진 제공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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