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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결혼의 문화사결혼식이 뭐길래
한동안 특급호텔에서 하는 초호화 결혼식이 유행하더니 요즘은 소박한 공간에서 가족과 친지,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해 소 규모로 식을 치르는 ‘스몰 웨딩’ 붐이 일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한 천편일률적인 결혼식에서 벗어나 일생의 중 요한 순간을 특별하게 보내려는 이들은 수중 결혼식이나 스카이다이빙 결혼식 등 이색적인 결혼식을 치르기도 합니다. 1950년대에는 국내 최초로 기내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한국만의 결혼식 풍경

예전에는 사모관대 차림의 신랑이 신부 집에서 머리에 족두리를 얹은 신부와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절을 올리며 치르는 전통혼례 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화려 한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큰 식당을 빌려 치르는 서양식 결혼식이 시작됐습니다. 1930년대에는 서울 종로 에 전문 예식장이 등장했고, 1960년대에 들어서며 강당 같은 공 간에 의자를 놓고 마그네슘을 ‘펑’ 하고 터뜨려 사진을 찍는 예식 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때부터 형편껏 내던 부조도 현 금을 봉투에 담아 주는 방식으로 변모했습니다. 축의금을 내면 찹 쌀떡이나 케이크 등을 답례로 줬고, 이를 더 많이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도 연출됐습니다. 1980년대에는 허례허식을 없 애기 위해 정부에서 호텔 결혼식을 금지하기도 했는데, 이 법은 1999년 폐지됐습니다. 1965년 한 신문에 “예식장이 기업화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 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이 기사에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서울 시내에 순수 예식장은 한 곳도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자기 집 정원이나 교회, 클럽 등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치른다”고 쓰여 있습니다. 당시 예식장 사용료는 3,000∼5,000원이었는데, 사진 촬영비와 장갑 비용을 따로 받아 총비용은 1만 원 정도였다고 합 니다.

1958년 기내 결혼식1958년 기내 결혼식

우리 하늘에서 결혼했어요

<사진>은 1958년 7월 3일 국내에서 처음 열린 기내 결혼식 장면 입니다. 이날 결혼식은 국내 최초의 민간 항공사인 대한국민항공 사(KNA)의 서울∼부산 정기항공기 DC-4 기내에서 진행됐습니 다. 당시 대한뉴스 171호는 ‘공중 결혼식’이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 의 결혼식을 전하며 신랑과 신부를 “우렁차게 들리는 프로펠러의폭음을 웨딩마치로 삼아 끝없이 푸른 창공을 동경하며 백년가약 을 맺은 한 쌍의 원앙”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또 다음날 신문에 이 결혼식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적 으로는 두 번째로, 공중에서 화촉을 밝힌다는 극적이면서도 드문 이야기”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기사에는 “푸른 창공을 끝없는 행 복의 지표로 삼겠다는 이 ‘하늘의 부부’의 신랑은 현재 육군 공병 대 소속 중위다. 항공사 사장의 주례로 가족 3명과 낯선 손님(일 반 승객)을 모신 가운데 검소하게 백년가약을 맺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날 항공사 사장은 신랑, 신부를 위해 여의도비행장 까지 전용차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또 우연히 하객이 된 일반 승 객에게는 케이크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이날 결혼한 두 사람은 피 로연 등 비용이 많이 드는 허례에서 벗어나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기내 결혼식을 선택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요즘 수중 결혼식, 스카이다이빙 결혼식 등 이채로운 결혼식을 하 는 커플들이 간혹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이벤트였습니 다. 기내의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다릅니다. 창문에 천으로 된 커튼 이 설치돼 있고, 수하물 보관함에 덮개가 없습니다. 또 기내 통로 도 두 사람이 엇갈려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매우 좁습니다. 1949년 설립된 KNA는 운영난에 허덕이다가 1962년 정부로부 터 정기운송 사업 면허 취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단발기 3대로 국내선 운항을 시작한 이 회사는 6·25전쟁 때 부산에서 쌍발기 3대를 추가했고, 1953년에는 정부에서 100만 달러 융자를 받아 기내 결혼식이 열린 4발기 DC-4를 구입했다고 합니다. 한미항공 협정 체결 후 서울~시애틀, 서울~홍콩 등 국제선도 개척했지만 1958년 쌍발기 창랑호가 납북되면서 사운이 기울었고, 경쟁사 ‘에 어 코리아’와의 출혈 경쟁으로 운영난이 심화됐다고 합니다.

사진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글 김구철_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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