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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와 영화음악 음악, 영화를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
르네 클레망의 1960년 작 <태양은 가득히>는 여름과 바캉스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 중 한 편이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한 앤서니 밍겔라의 1999년 작 <리플리>와 더불어 보면 더욱 재미있다. <태양은 가득히>가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을 닮은 영화라면, <리플리>는 늦여름 밤의 서늘한 기운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틈 관련 이미지

“마실 것 좀 줘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여기서 제일 좋은 걸로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살인을 저지른 남자는 완전범죄를 확신하며 해변의 한 카페에서 마실 것을 청한다. 운명이 곧 그를 사형대로 이끌게 될 거라는 점을 알지 못한 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하는 <태양은 가득히>는 총명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했던 청년 리플리가 미국인 재벌의 아들 필립을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데려오는 임무를 맡으며 시작된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필립의 삶에 리플리는 매혹되고, 그를 동경하는 것을 넘어 필립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는 위험한 욕망을 품는다. 리플리를 연기했던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의 불안정한 눈빛이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된 작품이다. <태양은 가득히>는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하는 앤서니 밍겔라의 1999년 작 <리플리>와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이 지면에서는 <리플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열망에서 시작된 파국

<리플리>의 주인공, 톰 리플리(맷 데이먼 분)는 뉴욕의 호텔을 전전하며 각종 행사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손님들의 시중을 든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의 재벌 그린리프가 프린스턴 대학의 재킷을 빌려 입고 피아노를 치는 리플리를 아들 디키(주드 로 분)의 친구로 오해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린리프는 리플리에게 거액의 돈을 줄 테니 이탈리아에서 유흥을 즐기는 아들을 뉴욕으로 데려와달라고 부탁하고, 리플리는 디키가 있는 나폴리의 몽지벨로로 떠난다. 이후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은 <태양은 가득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디키가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리플리의 동경은 열망으로, 열망은 욕망으로, 욕망은 살인이라는 파국으로 이어진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리플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음악이다. 앤서니 밍겔라는 그의 대표작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영화음악을 만든 가브리엘 야레와 다시금 호흡을 맞춘 이 작품에서 클래식과 오페라, 재즈 등 다양한 음악을 사용한다. <리플리>의 음악은 영화의 무드를 조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등장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로 기능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디키가 재즈광이라는 점이다.(원작소설 속 디키의 직업은 화가였다.) 그는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 쳇 베이커를 사랑하며 밤이면 재즈클럽에서 이탈리아인들과 어울린다. 그런 디키와 가까워지기 위해 리플리는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 재즈를 독학한다.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고 턴테이블에서 플레이되고 있는 재즈 음반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리플리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음악이 암시하는 서늘한 진실

디키가 비밥(Bebop)의 창시자인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를 특히 사랑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1930년대 유행했던 상업적인 스윙재즈에 대항해 탄생한 격렬한 즉흥연주와 빠른 템포의 자유분방한 연주 스타일이 바로 비밥이기 때문이다. “내 귀엔 재즈가 끔찍한 소음”이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둔 디키는 클래식의 세계에서 살아왔다. 스스로 보수적인 미국 상류층의 세계에 속하길 거부하며 유럽 대륙에서 늘 새로운 즐길 거리를 찾는 디키의 자유분방한 기질은 비밥이라는 재즈 장르의 특성과 맞닿아 있다.
한편 나폴리의 재즈클럽 무대에 올라 리플리가 부르는 곡은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이다. 유명한 재즈 스탠다드 넘버인 이 곡은 절제된 연주와 애상적인 무드, 쳇 베이커의 유약하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랑받았다.(영화에서는 맷 데이먼이 직접 <마이 퍼니 발렌타인>을 부르는데, 그의 미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억해야 할 장면이다.) 열정적이고 즉흥적인 비밥 재즈에 대항해 탄생한 쿨 재즈, 이 계열의 대표적인 뮤지션인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을 리플리가 부른다는 건 디키와 리플리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겨냥한 설정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디키를 죽인 뒤, 리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안경을 벗고 디키의 반지를 낀 리플리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리플리는 더 이상 재즈를 듣지 않는다. 찰리 파커를 들으며 흥겨워하지 않고, 쳇 베이커를 따라 노래하지 않는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관람하고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연주하며, 그는 “초라한 현실보다 멋진 거짓의 세계”에 머물기로 한다. 그 끝에 어떤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가 세속의 죗값을 받게 될 예정이라면, <리플리>의 리플리는 영원한 마음의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 서늘한 진실을 암시하는 <리플리>의 음악은 덧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다.

영화의 틈 관련 이미지

글 장영엽_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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