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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고 차운기 건축가의 ‘12주(柱)’ 수공예적 아름다움
종로구 신교동은 서촌에서도 가장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다. 조용한 골목에는 비슷비슷한 4~5층 박스형 빌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재개발 때문에 골목 형태의 길만 남겨놓고 나머지 필지들은 최대한 많은 수의 빌라를 지었다. 빽빽한 주택가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모양의 건물이 있다. 스페인 건축가인 안토니오 가우디가 떠오를 정도로 하나의 조각품을 연상케 하는 이 건물은 차운기 건축가(1955~2001)의 유작으로 제자인 원희연 건축가와 함께 설계한 ‘12주(柱)’라는 건물이다.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1 평범한 빌라들 사이에서 ‘12주(柱)’ 건물은 강한 개성을 드러낸다.
2 창호 부분의 처마는 마치 박쥐의 날개와 같은 모습이다.
3 녹슨 철판을 갑옷처럼 겹쳐서 굴곡을 표현했다.
4 12주(柱)에는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건축물에 배인 장인정신

‘12주(柱)’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바로 1층에 놓여 있는 돌들 때문이다. 원래 한옥이 있던 자리에 한옥을 허물고 건물을 지으면서 한옥에서 나온 주춧돌 12개를 가져다놓아 ‘12주(柱) 건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건물은 독특한 이름과 함께 개성 강한 형태로 평범한 빌라들 사이에 서 있다. 법적 테두리인 대지 경계선, 도로와 일조에 의한 사선 등 도시가 요구하는 관계는 그대로 건물의 큰 틀에 적용되었다. 부채꼴 모양의 대지에 건축 행위를 하기에는 주변 여건이 협소한데도 불구하고 입면을 곡선과 함께 중첩되는 방식으로 처리하여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규격화되지 않은 창호들과 철근, 철판 등 차운기 건축가가 즐겨 쓰던 낡고 오래된 재료들, 조형과 입면 구성 등에서 과감함이 표출된다.
12주(柱)는 상업성을 고려하여 지은 일반 집들과는 차별화된다. 쓰다 남은 각종 자재를 활용하고, 설계자가 손수 시공까지 참여하여 구석구석 ‘장인정신’으로 건물을 세웠다. 콘크리트, 목재, 철골 등 일반적인 건축 재료에서부터 양철판, 흙, 돌, 전등에 이르기까지 건축가가 사용한 재료 또한 매우 다양하다. 건축에 등장하는 갖가지 재료들을 보면서, 거창하게 ‘재료의 본성’이라든가, 혹은 일반인들은 이해 못하는 건축가들의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건축가는 그런 표현을 쓰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에서부터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재료라도 장인정신으로 실험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차운기 건축가의 대부분의 건물에는 도면이 없다. 평면도 한 장으로 건축을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그에게 도면은 ‘도면 그대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분위기로 건축을 한다’는 정도의 의미였다. 모든 결정은 현장에서 이루어졌으며 도면보다는 그때그때 필요한 스케치를 해 건설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했다.

있는 그대로의 재료들

건물에 가까이 다가가 입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출 콘크리트와 함께 표면에 박힌 아크릴봉이 보인다. 노출 콘크리트는 목재거푸집을 사용하여 일부러 거친 나무의 느낌 그대로를 표현했다. 이 거푸집도 쓰다 남은 것을 구해서 작업한 것이다. 노출 콘크리트 표면에 박힌 아크릴봉은 콘크리트를 타설할 때 일일이 수작업으로 심어 낮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밤에는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조명 역할을 해주는 오브제적인 요소로 사용했다. 또한 12주(柱)는 건물의 모든 창의 모양에 규칙이 없으며, 창호 처마는 마치 박쥐의 날개와도 같은 형상으로 제작됐다. 창호 처마에 사용한 철근과 녹슨 철판들은 필요한 곳에 모양이 어울리는 부분을 잘라다 붙인 것이지 일부러 모양을 낸 것이 아니다. 처마에 활용된 녹슨 철판은 굴곡으로 표현된 건물과 주차장 주출입구 상단 부분에도 활용되었다.
내부 또한 창호를 비롯하여 바닥, 문, 칸막이, 천장 등이 대부분 원목을 손으로 직접 깎고, 다듬어서 제작된 것들이다. 마룻바닥을 제외하고는 실내의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진행됐다. 또한 천장 부분은 한옥에서나 볼 수 있는 서까래를 만들어 한옥의 느낌을 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건축가 자신이 스스로 어울리는 것을 찾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해낸 결과이다. 차운기 건축가는 12주(柱) 건물을 작업하는 중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제자인 원희연 건축가가 작업을 완성했다. 열정적인 한 건축가의 상상은 지루하고 답답할 수 있는 신교동 주택가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제 더 이상 차운기 건축가의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글·사진 이훈길_ 천산건축 대표. 건축사이자 도시공학박사이다. 건축뿐만 아니라 건축 사진, 일러스트, 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도시를 걷다_사회적 약자를 위한 도시건축, 소통과 행복을 꿈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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