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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천수림 작가의 정동 산책 오롯이 혼자가 된다는 것
일상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천수림 작가에게는 정동길을 따라가는 미술관 산책의 시간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신문로까지 이어지는 그만의 묵상과 사색의 길을 소개한다.

“사람은 어디서든 고독할 수 있지만, 도시에서 수백만의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느끼는 고독에는 특별한 향취가 있다. (중략)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고독이란 사람들이 그 속에 머무는 장소임을. 도시에, 맨해튼처럼 엄격하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공간에 거주할 때 어떤 사람이든 처음에는 길을 잃게 된다. (중략) 그 시절 내가 쌓아올렸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내 경험과 타인들의 경험으로 짜 맞춰진 고독의 지도다.”
_ 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중에서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

〈옵저버〉(Observer)의 부편집장을 지냈고, 예술비평으로 주목받는 에세이스트인 올리비아 랭은 런던을 떠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뉴욕생활을 하기로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뉴욕은 너무나 ‘외로운 도시’였다. 이 외롭고 고독한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계기’는 처절한 고독 속에 놓여 있던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호퍼에서 워홀까지…. 그녀가 찾은 예술가들은 모두 처연하게 고독했던 이들이다.
올리비아 랭에게 뉴욕이 외로운 도시였듯이, 내게도 서울은 그다지 ‘친절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칼립투스’의 향처럼 위로받을 수 있는 ‘고독의 지도’를 꼽는다면 경향신문사에서 시작되는 ‘정동길’을 들 수 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신문로까지 이어지는 1km의 길을 지나 광화문의 일민미술관, 신문로의 골목길에 숨어 있는 성곡미술관까지 산책하는 일은 몇 십 년 이어온 습관이었다.

고독을 견디는 나만의 리추얼

모든 사람에게는 일종의 리추얼(<리추얼: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 메이슨 커리 지음)이 있다. 그 리추얼이 없다면 거대한 도시 속에서 ‘고독’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좀 더 과장하자면 정동길을 따라가는 미술관 산책 습관이 없었다면 난 아마도 이 ‘서울’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한남동에 있는 리움, 소격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청담동에 위치한 송은아트스페이스도 모두 좋은 전시공간이지만, 유난히 ‘정동길, 광화문 루트’를 편애한 이유는 오래된 가로수 때문일 것이다. 갈수록 거대해지는 초대형 도시인 서울에서 짧다면 짧은 이 길은 묵상과 사색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정동길은 덕수궁 대한문에서 신문로까지 이어지는 길인데 100여 년 전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 한양의 모습을 더듬어볼 수 있는 곳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이 있어 ‘정동’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곳은 덕수궁 등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조선말 서구열강의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다. 이화박물관 등 서구식 교육기관, 1930년대 지어진 신아일보 별관 건물과 같은 언론기관, 최초의 개신교 건물인 정동교회 등 종교 건물, 정동극장 뒤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으로 사용되었던 ‘중명전’(重明殿) 등이 집중된 근대 문물의 중심지였다. 정동 덕수궁 뒤편 언덕 위에 있는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은 현재는 출입문인 하얀 탑 부문만 남아 있다. 이곳은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위협을 느낀 고종이 잠시 피신을 했던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이 러시아 공사관 언덕길을 넘어가면 광화문 쪽 서울역사박물관과 성곡미술관으로 이어지는 한가로운 길이 나온다. 이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기에 더욱 조용하다.

서울이 특별해지는 순간

정동길 중간쯤에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서울시립미술관은 미술관 자체로도 좋지만, 미술관 앞 정원이 그만이다. 현 서울시립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재판소(법원)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던 자리에 있다. 광복 이후엔 대법원으로 사용되었다가 미술관 개축 과정에서 르네상스식 건물 전면부를 살렸다. 전면부 현관 아치는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미술관 초입엔 최정화 작가의 거대한 장미꽃 설치작품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이 놓여 있다.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청동 인물 조각인 배형경 작가의 <생각하다>(Thinking), 최우람 작가의 <숲의 수호자>(Silvanus)도 만날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앞마당은 1년 내내 좋지만, 굳이 가장 좋은 때를 꼽아본다면 벚꽃이 질 무렵이다. 물론 만개할 때는 더 없이 수려하겠지만, ‘봄이 가는구나, 곧 봄이 스러지겠구나’라는 애잔한 시간의 흐름을 오롯이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동에서 일민미술관, 성곡미술관을 들러 서울역사박물관 앞 정류장에 앉으면 어느새 ‘서울’은 다정한 모습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다니던 직장이 정동길과 가까웠으니 점심 먹고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들고 ‘산책’하는 호사도 특별하다기보다는 ‘일상’에 가까웠을 수 있지만, 여전히 내겐 특별한 루트다. 영화 <심야식당 2>를 보면 자신이 먹은 저녁식사 메뉴를 꼼꼼히 메모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매일매일 먹는 저녁을 이렇게 기록해두면 왠지 ‘특별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음식이, 어떤 이들에게는 산책이 일종의 리추얼이 되기도 한다. 일상의 소소한 의식들, 완벽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현재 살고 있는 이 ‘공간’이 특별해지기 마련이다.

글 천수림_ 작가, 아트 저널리스트. 월간 <사진예술> 편집장을 지냈고, 중국문화와 관련된 책 <북경살롱>을 펴냈다.
그림 김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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