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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서양화가 이미경 사라져가는 것들에서 찾은
소중한 가치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은 아름답다’라는 글귀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경 작가의 작품에는 시간의 흔적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이 있고, 작가의 따스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소박한 행복이 담겨 있다. 1998년 광주시 퇴촌면 관음리의 한 구멍가게를 시작으로, 지난 20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온 그녀. 우리는 이미경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잠시 숨고를 여유와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시간을 만난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1 이미경 작가가 처음 그린 구멍가게.
<퇴촌 관음리 가게>, 71×35cm, 1998

구멍가게에서 얻은 깨달음

평범함 속에서 발견하는 감동이 훨씬 더 감동스러운 세상이 되었다고 하면 억지스러울까. 이미경 작가의 구멍가게들을 만난다면 이 말에 깊이 공감할지도 모른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슴을 잠시 먹먹하게 만드는 힘.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우리는 그녀의 작품들을 통해 메말랐던 감정이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젖어드는 것을 경험한다.
지금처럼 먹을 게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을 살아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구멍가게에 얽힌 자신만의 에피소드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늘 떠올리며 살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회자될 수 있는 기억의 편린들이 존재한다. 이 작가의 구멍가게 연작들은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을 우리 곁으로 불러 모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 단 한 번도 들러본 적 없는 낡고 허름한 구멍가게가 그저 익숙하고 정겹고 아름다운 이유다.
“저도 어렸을 때 구멍가게에 대한 추억이 있어요. 구멍가게가 있는 건물에 세 들어 살았을 때도 있었고, 구멍가게 앞에서 ‘달고나’를 엄청 만들어 먹었던 추억도 있어요. 만날 조그마한 화로에 무릎을 데어서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어요. 그래도 그때는 즐거웠죠. 제 또래 분들이라면 어린 시절 구멍가게와 얽힌 기억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가 구멍가게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둘째아이를 임신하고 퇴촌 관음리로 이사한 뒤, 해질 무렵 동네를 산책하다 만난 구멍가게 때문이었다. 해질 무렵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구멍가게라는 공간적 배경이 묘하게 어우러져 마음을 빼앗겨버린 순간이었다.
“아이랑 손잡고 늘 다니던 곳이었어요. 근데 그날은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어요. 마침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바깥에 나와 먼 산을 쳐다보는데, 뭔가 속상한 일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저녁 하늘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보이고, 양철지붕의 색도 진하게 물들어가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꼭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었어요.”
이미경 작가와 구멍가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평범한 시골풍경에 주목한 그녀는 구멍가게라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소재를 통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도 얻었다.
“첫 구멍가게를 그리는 데 한 달이 걸렸어요. 펜화를 그린 이후 마음에 든 첫 작품이었죠. 구멍가게는 그야말로 설명이 필요 없었어요. ‘아! 좋구나. 그림이 이런 거지 뭐!’ 이런 원초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요. 그러면서 가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제가 좋아서 모아두는 정도였어요. 10년 동안 15점을 그렸으니까요. 마음에 드는 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그리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게 쌓여서 지금까지 오게 됐죠.”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2 따뜻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미경 작가의 작품들.
<봄날가게>, 91×72cm, 2016
3 <흥인수퍼>, 91×72cm, 2015
4 <나 어릴 적에>, 50×100cm, 2016
출처_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미경 지음, 남해의봄날)

20년간 그린 구멍가게, 책으로 펴내다

이미경 작가와 구멍가게의 여정은 서울 종로의 형제상회, 포천 만세리 로터리의 만세상회, 태백 정선의 선명상회, 해남 땅끝마을의 간판도 없는 무명가게, 제주 와흘상회까지 이어졌다. 오래되어 기울어진 나지막한 지붕,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낡은 벽, 정겨운 우리말 간판까지…. 구멍가게는 수십 년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장소와 계절이 각기 다르고, 구멍가게들의 모습도 제각각이지만 그 속에는 상상력의 나래를 마구 펼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20년 동안 그린 그림들을 작가는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란 책으로 펴냈다. 정성껏 그린 200여 점의 구멍가게 그림 중 작가가 엄선한 80여 점의 작품과 구멍가게에 얽힌 경험을 잔잔하게 녹여냈다. 이제는 전설이 된 가게들을 소개하는 것은 더 늦기 전에 우리와 한 시대를 살았던 소소하고 소박한 존재들과 눈빛을 나눌 기회를 제공하고, 각자의 추억 속에 자리한 구멍가게로 가는 길을 펼쳐놓고자 함이다. 책 출간은 20년간의 작업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통영에서 북 토크와 번개전시회를 하고 왔어요. 그림을 싸들고 가서 부산, 거제 등 경상도의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났어요. 서울에서 전시회를 했을 때보다 관람객이 훨씬 많았던 것 같아요. 또 어제는 춘천에 일이 있어서 간 김에 옥기상회에 다녀왔어요. 4~5년 전에 만났던 주인 할아버지께 사인한 책을 전해드렸어요. 옥기상회가 나온 지면을 보여드리니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저 또한 기뻤죠.”
작품 초창기에 그린 구멍가게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는 곳도 꽤 많다. 신작로의 탄생과 가게 주인의 부재 등은 곧 구멍가게의 소멸을 의미했다. 편의점과 대형마트에 밀려 서서히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구멍가게는 이제 시골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다. 이 작가는 처음에는 이러한 현실이 충격이었다고 한다.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다 보니까 빠르게 사라지는 가게들이 안타까웠어요. 한 시대에 그런 공간이 있었고, 그 속에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행복한 삶이 있었다는 것을 남기고 싶었어요. 언젠가부터 우리는 구멍가게 대신 편의점에 익숙해진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주변에서 구멍가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채 말이죠.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우리는 그것의 부재를 인식하게 되잖아요. 그게 안타까웠어요.”
구멍가게를 통해 소소한 것도 가치가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는 이미경 작가. 더불어 가게를 50년 넘게 지켜온 주인들의 삶은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을 꿋꿋하게 해온 대견함과 자랑스러움이기도 했다. 이는 그녀 자신에게 건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구멍가게가 건네는 따뜻한 울림

이미경 작가의 작품 속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뜨거운 햇볕을 다 가려줄 듯한 커다란 나무, 무수히 많은 사연들이 오갔을 법한 빨간 우체통, 이웃들과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눴을 커다란 평상 등에서는 아날로그적 정취가 가득 묻어난다. 자물쇠로 잠그지 않아도 누가 가져가지 않는 자전거, 나무 그늘을 가득 받고 있는 정겨운 장독대가 이야기를 건넨다. 우리의 행복했던 삶이 그곳에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고. “한 번 여행을 가면 50여 개 정도의 구멍가게를 사진으로 찍어왔어요. 그중에 작품으로 나오는 건 3~4개 정도고요. 평상, 우체통, 창문, 지붕만 모아서 찍는 경우도 있어요. 구멍가게를 실제보다 조금 더 아름답게 묘사한 적도 있어요. 알루미늄 섀시를 상상력을 발휘해 나무 문틀로 바꿔 예스럽게 그리기도 하고 실제로는 없는 아름드리나무를 그려 넣기도 하죠. 현실 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비현실 같은 거예요. 이랬으면 좋겠다는 제 바람이 들어가 있기도 하고요. 이런 그림을 통해 ‘아! 우리 동네에도 이런 구멍가게 하나가 있었지!’라고 그 시절을 더욱 아름답게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림 속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 있고, 그때의 향기와 바람, 소소한 추억들도 담담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작가의 시선은 따스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은 오늘을 반추하게 만든다.
이 작가는 작품 모두를 펜으로 그렸다. 하나하나 손끝으로 칠하고 또 칠하고를 반복해야 하는 펜화는 그녀가 추구하는 오래된 기억이나 시간의 중첩과도 맞닿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였을 법한 이야기들은 수백, 수천 번을 오간 펜화처럼 깊이 있고 또 정성스럽다. 가는 펜선이 이어지고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선과 면, 그리고 오묘한 색과 명암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감탄을 자아낸다.
펜화만의 정교함과 선의 중첩을 통한 색의 표현도 매력적이다. 28색의 아크릴 잉크를 적절히 배합해 모두 80색 정도로 작업하는데, 초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담는 기록적 의미가 강했지만 요즘은 여러 요소를 묶고 배치하는 ‘내 마음속의 구멍가게’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그림의 밀도는 높아지고 색은 선명하면서도 따뜻해졌다.
“한때는 펜화 대신 유화로 구멍가게를 그리기도 했어요. 붓으로 칠하면 여러 번 칠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런데 이미 펜에 더 익숙해졌더라고요. 어떤 재료에 익숙해지려면 최소한 10년이 걸린다는 누군가의 말이 이해되더군요.”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정서와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녹아 있는 그녀의 작품에서는 무수한 이야깃거리가 발현된다. <나 어릴 적에>에서는 놋으로 만든 밥주발을 식지않게 색동 비단이불 속에 묻어둔 모양을 그렸다. 밥주발에는 갓 지은 밥이 들어 있을 것이다. 가족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은 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마음이 그림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내가 아니면 이 이야기를 남길 사람이 없겠다’ 싶은 소재를 만나면 반드시 그림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제 그림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중요해요. 제가 그린 그림을 통해 누군가 추억을 나눌 수 있고, 그로 인해 이야깃거리가 제공된다면 더없이 좋죠. <나 어릴 적에>를 본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밥솥이 귀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주더라고요. 세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그 시절이 회자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스토리는 그녀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나 어릴 적에>도 그렇지만, 20년 동안 구멍가게 작업을 끌고 갈 수 있었던 힘도 스토리 덕분이다. 그녀의 그림을 통해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상상할 수 있는 것 또한 스토리의 힘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남기는 작업

이미경 작가의 작품은 외국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지난 3월, 영국 BBC에서 ‘사라져가는 한국 구멍가게들의 매력’(The Charm of South Korea’s Disappearing Convenience Stores)이라는 제목으로 이미경 작가의 작품 10점과 인터뷰를 소개해 화제가 됐다. 구멍가게를 직접 체험했던 세대를 넘어서 젊은 세대까지, 또 한국을 나아가 해외에서까지 구멍가게의 정서를 공감한다는 사실이 이 작가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BBC에서 제 작품을 다룬 기사를 보고 ‘사라져가고 소멸해가는 문화가 단지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들에게도 구멍가게처럼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겠죠. 그런 점 때문에 제 작품에 공감한 게 아닐까 싶어요. 구멍가게를 통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잠시라도 환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이미경 작가는 지금까지 구멍가게만 200여 점 넘게 그렸다. 그녀는 “작업은 고되지만 완성된 모습을 빨리 보고 싶어서 더욱 애를 쓰게 된다”며 미소 지었다. “계속 구멍가게만 그리니까 지겹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에게는 항상 새로운 작업이에요.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구멍가게가 없잖아요. 이름이 없는 구멍가게는 제가 직접 작명을 해주기도 해요. 작업실에서 구멍가게와 마주하고 있을 때가 제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이 작가는 다가오는 8월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더 좋은 작품들을 선보이기위해 전시회 전까지는 작업에만 몰두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구멍가게 작업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또 하나 해보고 싶은 작업은 전국에 있는 오래된 책방을 그리는 거예요. 다작이 아닌, 희소성이 있는 작품, 모든 작품에 세세하게 정성을 들이고 저만의 색을 입히는 작업을 지속해 나갈 거고요.”
우리 생활 속에서 잊혀져가는 것들, 사라져가는 추억들을 꺼내서 그림으로 그리고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이미경 작가. 우리는 그녀의 그림을 통해 과거와 마주하며 오래된 것들의 정겨움과 소중함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바쁘고 꽤나 무뎌지기 쉬운 팍팍한 일상에서 만나는 그녀의 작품이 앞으로 우리에게 또 어떤 추억과 그리움을 소환해줄지 기대된다.

글 한율
사진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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