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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앙꼬의 <나쁜 친구>와 세계 각국의 자전적 만화들 정말로 나쁜 친구가 누구였는지 말해줄게
글과 그림은 자기표현의 유용한 수단이다. 그중에서도 만화는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자칫 자족적이고 우울한 자기 고백에 그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명석의 썰 관련 이미지앙꼬의 <나쁜 친구> 본문 중에서.

세상에는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가 있다.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분명해지지만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특히나 이런 경우엔 큰 후회가 된다. 그 나쁜 친구가 바로 나였을 때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할까? 앙꼬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쁜 친구>라는 만화로 그렸다. 출판 시장에서의 반응이 뜨겁지는 않았다. 그저 ‘또 좋은 만화책을 한 권 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 책은 몇 해 뒤 프랑스에서 출판되었고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은 앙꼬에게 ‘새로운 발견상’을 안겨주었다. 한국 만화가로서는 앙굴렘에서의 첫 수상이었다. 앙꼬의 솔직한 이야기는 지구 반대쪽의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이었던 듯하다.
왜 유럽인들은 저 먼 아시아에 살고 있는 만화가의 사적인 이야기, 청소년기의 작은 일탈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하나는, 그들은 이런 종류의 만화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솔직하게 그려낸 만화가 매우 중요한 장르를 형성하며, 서가 한쪽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물론 유럽에서도 초능력과 마법이 난무하는 화려한 상상의 만화가 더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래픽 노벨의 세계에서는 이에 못지않게 작가주의 만화, 특히 자전적 만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상상이 아니라 진짜 체험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세계 각지의 자전적 만화들과 한국의 사례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는 이란에서 태어난 뒤 오스트리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다시 이란에 돌아갔다가 프랑스에 정착한 만화가의 삶을 그리고 있다. 개방적이었던 이란 사회가 급속히 반동화되는 과정에서 특히 여성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부조리를 과감히 고발한다. <미래의 아랍인>을 그린 리아드 사투프는 시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와 보수적인 친척들로 가득한 시리아를 체험했던 이야기를 꼼꼼히 펼쳐낸다. 사투프는 극악한 테러의 희생양이 된 만화잡지 <샤를리 에브도>의 주요 필진이었기 때문에, 절반은 시리아 사람인 그의 경험이 더욱 궁금해진다. 한국에서 태어나 벨기에에 입양되어 판타지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융 헤넨(한국명 전정식)은 <피부색깔=꿀색>을 통해 자신과 주변 입양아들의 아픈 현실을 고백한다.
미국을 살펴봐도 언더그라운드 혹은 대안 만화의 상당수는 자전적인 작품들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아버지와 현재의 작가 자신을 오가며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가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더프 백더프가 그린 <내 친구 다머>의 주인공은 실존하는 연쇄 살인범이다. 작가가 다머와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직접 본 다머의 모습에 여러 취재를 더해 연쇄 살인범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
꼭 살인, 전쟁, 테러와 연관된 과격한 경험만을 담는 것은 아니다. 줄리아 워츠는 <방귀 파티> <뉴욕에서 살아남기> 등을 통해 독립 만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여성 만화가의 삶을 냉소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나는 얼간이고 한심한 인생이라고.” 이런 정서는 한국 사회의 젊은 예술가들과도 아주 잘 통한다. 국내에서도 김수박의 <아날로그 맨> <메이드 인 경상도> 마영신의 <뭐 없나?> 김성희의 <몹쓸 년> 등의 자전적 만화가 독립 만화계의 중요한 축을 만들어오고 있다.
유독 만화가들이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작품 속에 솔직히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만화는 창작 작업의 대부분이 1인에 집중돼 있고 저예산 작업이라 남의 눈치를 덜 보아도 되며, 만화체의 그림은 항상 적당한 유머를 가미할 수 있어서 작가의 쓰라린 체험이나 숨 막히는 고통의 모습도 덜 부담스럽게 표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만화가의 스타일에 따라 자전 만화의 스펙트럼은 넓게 펼쳐진다. 가벼운 그림일기부터 오랜 가족사를 파헤치는 연대기적 작품, 사회적 논란이 되는 현장을 직접 체험한 르포 만화 등도 가능하다.

이명석의 썰 관련 이미지

솔직함은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다

물론 이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없지 않다. 사실 자전적 만화의 상당수는 자족적이고 듣는 이를 고려하지 않는 우울한 자기 고백에 그치기도 한다. 이들 만화의 내용은 흥미로운 모험담도 있지만, 자신의 실수, 치부, 상처와 연관된 경우가 많다. 비겁한 도둑질, 어린 시절의 성폭행, 연인과의 다툼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달라지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만화가는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합리화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니라 그 사건에 개입되었던 주변인들의 사생활까지 공개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만큼 가치가 있다.
앙꼬의 <나쁜 친구>는 백 퍼센트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의 체험에 크게 기대고 있지만, 다른 비행 청소년의 삶을 함께 담기 위해 성실하게 취재했다.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만화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만화였기에 살을 발라내고 뼈를 깎아내는 과정을 더했음에 분명하다. 자전 만화는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가장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낸다. 직업적 만화가가 아니더라도 좋다. 누구나 펜과 종이가 있다면, 한 번쯤 도전해보아도 좋으리라.

글 이명석_ 문화비평가 겸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행의 즐거움과 인문학적 호기심을 결합한 <여행자의 로망백서>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도시수집가> 등의 저서가 있고, KBS 라디오 <신성원의 문화공감>,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에 고정 출연 중이다.
사진 제공 창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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